『인간 희극』의 심연
『외제니 그랑데』에서 외제니는 사랑하는 샤를에게
자신의 금화를 기꺼이 내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던 내게,
당신은 그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돈은 수단일 뿐이죠, 그게 다예요.”
이는 오노레 드 발자크 문학의 핵심을 꿰뚫는 선언이기도
하다.
돈은 수단이다. 그러나 그 수단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며, 때론, 어떤 사랑보다도 강한 힘을 행사한다.
발자크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작가였다.
소년 발자크는 나폴레옹의 동상 앞에 당돌한 포부를 적었다.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루겠다.”
정복자가 무기로 제국을 세웠다면, 발자크는 문장으로
또 다른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 —
총 90여 편의 작품과 2,000여 명의 등장인물을 담은
문학적 거대 프로젝트였다.
『인간 희극』은 발자크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린 일생 최대의 기획이자,
단순한 연작 소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발자크는 이를 “프랑스 사회의 생태계 전체를 재현하고자
한 시도”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급, 모든 직업,
모든 세대를 재현해보고 싶었다.
이 거대한 인간 군상은 하나의 작품 안에 살아
숨 쉬어야 했다.”
『인간 희극』은 크게 세 부문—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로 나뉘며,
부르주아의 욕망, 귀족의 허영, 성직자의 위선,
예술가의 방황, 여성의 인내, 상인의 계산까지
프랑스 19세기의 모든 인간군을 보여준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사회의 ‘총체적 리얼리즘’이었고,
그 구성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인물들은 작품을 넘나들며 출현하고,
사건은 얽히고설켜 축적되며,
독자는 마치 한 도시에서 사는 듯한 착각을 경험한다.
이 문학적 제국을 만든 발자크는 ‘예술가’로만 살지 않았다. 그는 현실 속에서도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펜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외친 발자크는,
돈을 벌기 위해 인쇄소를 열었고, 출판사를 차렸고,
심지어 신문사까지 창간했다.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독립적인 문학 사업가로
성공해보려 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거의 실패로 끝났다.
부채는 점점 불어났고, 매일 아침 커피를 열 잔씩 마셔가며 그는 필사적으로 글을 써야 했다.
“나는 굴이 무너져 탄광 속에 갇힌 광부가 목숨을 걸고
곡괭이를 휘두르듯 그렇게 글을 썼다.”
이 고백은 발자크 문학의 정수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의 글은 머리로만 쓴 것이 아니라, 몸과 빚과 땀으로 썼다. 삶을 걸고 쓴 문장이었고,
그것이 바로 발자크 문학의 질감이다.
『외제니 그랑데』의 한 장면—
샤를이 외제니에게서 금화를 받고, 대신 어머니의 금 상자를 맡기는 장면은 그런 발자크적 아이러니의 응축이다.
사랑을 위한 거래이지만, 결국 돈을 매개로 관계가 형성된다. 돈이 없었다면 샤를은 외제니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 외제니는 그를 다시 기다릴 수 있었을까.
발자크는 묻는다.
“사랑이 먼저인가, 돈이 먼저인가?”
『인간 희극』은 바로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문학을 넘어
우리 삶의 지도와 지형을 바꾼다.
발자크는 인간을 해부했다.
돈을 칼로 삼아, 펜으로 피부를 가르고 심리를 드러냈다.
나폴레옹이 영토의 제국을 세웠다면,
발자크는 인간의 제국을 구축한 것이다.
『인간 희극』은 인간의 ‘욕망 지도’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돈을 향한 욕망, 사회적 신분 상승, 재산 상속을 둘러싼
기만과 타락,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인간의 민낯. 그래서 『인간 희극』은 자본이 인간을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보여주는 돈의 시대를 위한 사회적 해부도다.
그는 펜을 들어 금화를 새겼다.
글을 통해 돈을 벌려했지만, 정작 글에서 가장 생생하게
그려낸 것은 돈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또 부서 뜨리는 가였다.
그는 부자가 되려 했고, 인간의 탐욕을 영원히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발자크는 오늘날까지도,
문학을 통해 돈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해부한 작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