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에서 시작된 한 영혼의 기록
“7월 초 찌는 듯한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에
S골목에 있는 하숙집에서 세 들어 살던 한 청년이
골방에서 골목으로 나와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으로
K다리 방향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그는 운이 좋게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지 않았다.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밑에 있는 그의 골방은
방이라기보다는 벽장에 가까웠다.”
이보다 더 간결하게, 더 명확하게, 그리고 더 절박하게
한 인간의 고통과 추락의 서사를 예고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의 첫 문장에서 이미 소설 전체를
응축해 놓는다.
도망치듯 좁은 방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나서면서도
주저하는 이 청년의 걸음걸이는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과 이성 사이를, 초인 사상과 죄의식 사이를
방황하는 한 인간의 심연이다.
현실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모든 것이 상징이다.
S골목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제 지명인 스톨랴르니
골목이고, K다리는 코쿠시킨 다리다.
그러나 이 장소들은 단지 지리적 정보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평생을 유랑하며 몸소 겪었던 궁핍과 절망의 메타포이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이름 자체로 ’분열된 자(раскол,
분열)’를 의미한다.
이 인물은 도스토옙스키가 일생 동안 사유해 온 사상적
논쟁의 화신이자, 러시아라는 대륙이 낳은 상처의 구현이다.
그는 비열하고 유약하면서도 고결하고 고통스러우며,
비논리적이면서도 지독히 이성적인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이 ‘청년’은 단지 허구적 인물이
아니라, 19세기 러시아의 어둠이 쌓이고 쌓여 탄생한
집단적 무의식의 정수다.
실제로 작가 자신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생을
가난 속에 살았다. 무려 스무 번이나 거처를 옮겼고,
집세를 내지 못해 주인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벽장 같은 방, 숨소리조차 들킬까 두려워하는 삶.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창조’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부를 ‘잘라낸’ 것이다.
우리는 이 첫 문장 속에서 이미 도스토옙스키의 자화상을
보고 있다.
위층에서는 황금 접시에 식사가 오가고,
아래층에서는 영혼마저 헐값에 팔리는 거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을 향한 제국의 야망이 빚어낸
인공도시였지만, 그 속의 하층민은 여전히 진흙 위를 걷고
있었다.
죄와 벌의 구상 역시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다.
1865년, 한 점원이 도끼로 두 노파를 살해한 사건을
다룬 신문 <골로스(목소리)>의 기사.
그 기사를 읽으며 단지 ‘소재’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범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철학적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그는 범죄자 개인을 탐색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죄를 규정하는 사회의 시선, 벌을 정당화하는 국가의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라는 신성한 주제에 다가간다.
그는 유난히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범죄 기사에 집착했다. 수감 생활을 했던 경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낸 시간,
죽음 선고 직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인간의 가장 낮고 어두운 구렁텅이를 통과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묘사한 인물은 모두 살아 숨 쉰다.
우리는 라스콜니코프를 혐오하면서도 연민하고,
이해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된다.
이 다면성과 모순, 바로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임을 그는 누구보다 깊이 꿰뚫어 보았다.
그러기에 이토록 절망적인 이야기를 읽고도 우리는 결국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는 어둡고 혼탁하며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끝내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사랑이다.
그의 소설에는 언제나, 가장 구석에, 가장 낮은 자리에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라스콜니코프가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모든 폭력과 죄를 뚫고 나온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을 향해 내미는 손길 덕분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였다.
그의 문학은 복음서의 음조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날카로운 심리학자의 눈을 가졌다.
그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거기서 눈부신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소설을 단지 고전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정밀한 지적 장치이자,
내면의 구원을 향해 건네는 서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