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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붉다는 건, 하루가 시를 썼다는 뜻이다.

by 김지향

플로리다 해변에서의 여름 노을,

그리고 텍사스 들판의 저녁 하늘은 늘 나를 멈춰 세운다.


미국 남부의 노을은 유독 풍요롭고 오래간다.

빛이 길게 늘어지고, 하늘은 한없이 깊어진다.

햇살은 이미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았는데도,

하늘은 마치 뭔가 더 보여주고 싶은 듯

카라오렌지 색, 붉은 자주색, 복숭아빛을 번갈아 펼쳐놓는다.

마치 자연이 하루의 마지막 장면을 천천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감아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었다.

“노을은 하루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야.”

저녁마다 하늘을 보면, 이 말이 조금씩 가슴에 들어온다.

햇살로 채우기엔 모자란 하루였더라도,

세상은 끝내 아름다움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노을의 진심 아닐까.


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가 쓴 단편 『초원(Степь)』에서도

소년 예고르쉬카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해 질 녘

풍경에 압도당한다.

작품 속 묘사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해는 지고 있었다.

초원은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모든 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빛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순간.

자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리는 듯한 그 장면.

바로 그게 미국 남부의 노을이 주는 정서다.


때로 어떤 날은 노을이 음악처럼 느껴진다.

소리 없는 피아노 연주처럼,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날 것 같은 멜로디처럼.

특히 플로리다의 석양은 바닷물과 구름이 섞여 만들어내는 붉은 하모니가 감탄을 넘어 경외로 다가온다.

빛이 물결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완벽한 연출이다.

“지금이 바로 클라이맥스야.”

누군가 속삭인다면, 그건 아마 노을을 본 사람일 것이다.


노을은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이 하루도 예술이었음을 말해주는 자연의 서명이다.


우리 삶에는 이처럼 천천히 감상해야 할 장면들이 꽤 많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놓치고 지나갈 때가 있곤 하다.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기에,

저녁 하늘조차 보지 못한 채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남쪽 하늘의 노을은 우리에게 말없이 속삭인다.

“조금은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삶은 빨리 끝내야 할 보고서가 아니라,

물들어 가는 풍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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