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만두, 그리고 어머니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른 아침,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삐걱 열리더니, 어머니가 조간신문을 들고
들어오신다.
마치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오신 듯한 모습이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 한 잔과 함께 조간신문을 정독하시는
루틴은, 여든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시다.
그 장면은 내 기억의 가장 오래된 습작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한때, 신문은 활자의 권력이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이른바 ‘4대 일간지’의 시대.
아침에는 조간이, 오후에는 석간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읽고 판단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금처럼 속보가 휴대폰으로 밀려들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신문은 말 그대로 ‘세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종이 신문을 읽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여전히 그 세상의 한 귀퉁이를
손끝에 꼭 쥐고 계신다.
나는 어린 시절,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부터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신문을 접했다.
그때는 소년 중앙일보, 소년 동아일보 같은 어린이 신문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신문을 제대로 읽었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 어머니는
기사 내용을 묻곤 하셨다.
그 순간 나는 매일 아침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되었다.
그 압박감은 나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여전히 즐기신다.
감동적인 사연이나 유익한 정보를 발견하면 꼭 소리 내어
읽어 주시고, 감상평까지 요구하셨다. 지금도 그러신다.
그 소리는 어쩌면 활자가 살아 숨 쉬는 순간이었고,
어머니는 그 활자의 따뜻한 해설자였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상징은
‘고기만두’다.
요즘은 대부분 만두피를 사서 만두를 빚지만, 내 어머니는
반죽을 손수 치대고, 밀대로 하나하나 만두피를 빚으신다.
그 과정은 단순한 요리를 넘어서, 일종의 의식(儀式)처럼
느껴진다.
만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육즙은 그 정성의 밀도만큼 깊고
따뜻하다.
여기서 나는 문득, 고대 그리스어의 ‘심포지움’이 떠오른다.
이 말의 어원은 ‘함께 마시다’(syn, 함께 + pinein, 마시다)
에서 유래했으며,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음식을 매개로
나눈 철학, 우정, 시와 노래, 인생의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교류의 장이었다.
어머니는 그 심포지움의 정신을 본능적으로 알고 계신
듯하다.
내 어머니는 늘 음식을 정갈하게 담으신다.
단순한 반찬이라도 작은 접시에 나누어 담고,
나물 위에는 깨를 흩뿌리시며 색의 균형을 고려하신다.
그 정성은 단순한 미각의 향유가 아니라 시각, 촉각,
감정까지 두루 자극하는 다감각적 미학이다.
음식은 몸을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결을 다독이는 예술이기도 하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민자의 삶 속에서 겪는
서늘한 고독이 문득 실감 난다.
늦은 오후, 집 안에 고요함이 스며들 때,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어머니의 만두가 식탁 가운데 놓이고,
나는 자꾸만 그 손끝의 온기를 떠올린다.
신문을 읽으며 세상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만두를 빚으며 나누었던 포근한 사랑들.
그 모든 기억이 내 안에서 작고 단단한 아카이브가 된다.
그 아카이브의 이름은 ‘어머니’다.
내 어머니는 오늘도 커피 한 잔과 함께 세상을 읽고,
만두를 빚으며 세상을 품는다.
그리고 나는, 비록 멀리 있지만
내 어머니의 페이지 한 귀퉁이에 늘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