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화가가 방 안에 수영장을 만드는 방법

그리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사람, 앙리 마티스(1869-1954)

by 김지향

예술은 때로 고통의 산물이다.

아니, 고통을 뚫고 나온 기적에 더 가깝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그것을 삶으로 증명한

화가이다.


20세기 현대 미술을 논할 때 피카소와 마티스는

늘 나란히 거론된다. 그러나 둘은 너무도 달랐다.

피카소가 세계를 파편화해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정의했다면, 마티스는 빛과 색, 선과 형태만으로 세계를

단순화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내려 했다.

그가 자신의 예술을 “팔걸이 있는 안락의자처럼 편안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마티스에게 ‘안락’보다는 ‘극복’을 요구했다.

그는 말년에 심각한 건강 문제로 수술을 받고, 더 이상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드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마티스는 이 상황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전혀 다른 도구로 자신의 감각을 되살리고자 했다.


과슈 물감으로 색을 입힌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꼴라주(Collage)’.

그의 대표적 후기 기법은 바로 그 한계에서 탄생했다.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 니스(Nice)의 햇살을 유독 사랑했다.

그는 “모든 것이 마법 같은 은빛 햇살로 빛난다”고

표현했으며 이 지중해 도시를 예술적 안식처로 삼았다.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니스에 있는 레시나 호텔을 통째로

사들여, 그 안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꾸민다.

밖에 나가 자유롭게 풍경을 볼 수 없었지만,

마티스는 단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방을 수영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인근 깐(Cannes)의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

수영하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관찰한 뒤 돌아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춘 벽에 파란색 종이를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그 파란색은 물이었다.

그 속을 나는 듯 헤엄치는 사람들의 형상이,

다이빙하는 곡선이, 인어와 물고기의 유려한 선이

칼과 가위로 찢어진 종이의 춤으로 재현되었다.

그가 창조한 방 안의 수영장,

바로 작품명 *수영장-1952* 이다.


이 작품은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되어 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꼴라주는 캔버스가 아닌,

흰 벽지 위에 붙인 종이들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는 이제 ‘그리지 않고도 그릴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 역시 마티스를 가장 존경했던

화가로 꼽았다.

미국 팝아트의 아이콘인 워홀은

“나는 그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워홀이 반복과 소비를 통해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를

표현했다면, 마티스는 고요함과 평화 속에서도 ‘저항’을

숨기지 않은 예술가였다.

그의 저항은,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꺾지 않고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용기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몸이 아프지 않고, 캔버스 앞에 계속 설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 유명한 마티스의 ‘수영장’을 만날 수 있었을까?


다른 시선으로, 다른 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마치 방안에 수영장을 들여놓듯이.


오늘도 막막한 답답함이 서걱될 때, 마티스를 떠올린다.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시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한 사람.

그의 수영장은 외부를 향하지 않고도 바다처럼 드넓고,

우주처럼 깊고 따스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야구와 자율주행의 도시, 애리조나주의 피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