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댈러스의 이른 새벽. 창밖에서 스며드는 여명은
도시의 견고함을 살며시 밀어내는 듯했다.
엔진이 잠잠해지는 순간, 아들과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
대략 23 시간에 걸친 남부 횡단의 시작이다.
*루이지애나 – 슈리브포트의 매콤한 한 끼*
첫 정차 지점은 루이지애나 주의 작고 조용한 도시,
슈리브포트(Shreveport)다. 이곳은 19세기 초, 오일 붐이 시작되면서 번성했지만 지금은 정체성과 문화가 흥미롭게 뒤섞인 도시로 남아 있다.
스파이시한 루이지애나 치킨을 파는 한 스낵 델리에서
우리는 향신료 가득한 치킨과 옥수수튀김을 주문했다.
주방에서 나온 흑인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 동네 치킨은 마법 같아요. 한 입만 먹어도 모든 시름이 사라져 버리는 맛이죠!”
그 말에 나도 웃으며 물었다.
“정말 맛있네요, 그 마법의 비밀이 궁금한대요?”
그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우리 할머니 레시피죠.
레몬즙, 파프리카, 그리고 마지막엔 카이엔 페퍼 톡톡!”
디저트로 엔젤 케이크 한 조각씩을 먹고,
“안전한 여행 하세요(Y’all be safe)!”를 외치며
손을 흔드는 그의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미시시피 강 – 빅스버그에서의 남북전쟁*
먼로를 지나 미시시피 주로 접어들면,
*빅스버그(Vicksburg)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엔 크림색의 오래된 철도 다리가 미시시피 강 위를
가로지르는데,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렸다. ‘들판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전장은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는 미시시피 강물이 톰과 허클베리를 조용히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이 강물이
얼마나 신비로운 동시에 위험했는지가 생생히 전해진다.
이렇게 중첩된 문학과 역사의 풍경을 마주하자,
고요한 강물이 오래된 얘기를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잭슨 – 남부 쿠진의 풍미와 이야기*
미시시피 주도 잭슨(Jackson)의 다운타운 식당에선 정통
‘남부 쿠진(Cusine)’을 맛봤다. 그 집은 1900년대부터
이어진 가문 식당으로, 오래된 우드 테이블과 흰 접시에 놓인
바삭한 프라이드치킨, 옥수수빵, 매콤한 감자 그라탱으로
유명하다.
옆 테이블에는 잘 차려입은 노부부가 있었다.
연세 지긋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은 4대에 걸쳐 이어온 식당인데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매년 연말이면 이 식당 전체가 주민들의 웃음과 춤으로 가득 메워지죠.” 말하는 내내 눈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남부 지역에선 눈을 마주치면 모두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음식의 짠맛 속에 담긴 노스탤지어가 나의 가슴까지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모빌 – 바다와 이국적 흔적의 조우*
다음 경유지 앨라배마의 모빌(Mobile)은 한때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를 거쳐 상인이 붐비던 항구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해안가에 들어선 작은 해산물 식당에서 오이스터, 검보 수프, 새우와 게를 맛보며 바다를 눈으로 한껏 담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긴 파도 소리가 카니발 음악과 섞여,
이국적인 풍경의 멋을 더했다.
*스페인 요새(Spanish Fort) – 역사 속 산책*
스페인 요새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고요한 산책로를 걸었다. 요새가 있던 자리엔 하얀 방어벽만이 남아 있지만,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의 발소리는 나뭇잎 사이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듯했다.
강렬한 햇살 아래, 남부 사람들은 편안한 리넨 셔츠에
밀짚모자를 쓰고, 마주칠 때마다 싱그러운 인사를 건넸다.
지나는 행인들과 인사를 수없이 나누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친절한 남부 사람들의 미소가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길 위의 작은 쉼표– 그레이튼 해변(Red Bar)*
플로리다로 넘어가는 국도를 따라 굽이굽이 펼쳐지는
걸프코스트의 경치는 숨이 멎을 듯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 햇살에 빛나는 얕은 바닷물,
소나무와 야자수로 가려진 작은 마을들.
그레이튼 비치에 있는 ‘The Red Bar’에 들러
새우튀김 포보이를 한 입 베어 먹고,
블루스 음악이 흐르는 마당에서 잠시 풍경에 젖어들었다.
바닷냄새에 섞인 피망과 양파 향이 여행의 여운을 더했다.
*탤러해시 – 나무 그늘 아래의 오후*
오후에 도착한 플로리다 주도 탤러해시(Tallahassee)는
‘나무 그늘 도로’로 유명하다.
아홉 개의 도로가 초록 터널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 차를
몰며 느낀 건, 이곳 사람들에게 나무는 그저 자연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라는 것이다.
다운타운 마켓플레이스에서는 사과 파이와 구운 견과류를 맛보고, 밴드의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남부의 현대적 감수를 느꼈다.
*게인스빌 – 새로운 시작의 도시*
마침내 게인스빌(Gainesville)의 플로리다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했다.
아들은 장시간의 운전으로 약간은 상기된 모습으로 필드의 마운드에 올라섰고, 나는 잔잔한 전율을 느꼈다.
드넓은 잔디와 오래된 팜나무, 그리고 환한 미소로 맞아주는 스태프들의 모습은 마치 축복을 담은 연극 무대 같았다.
이번 여정은 그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역사를 담은 요리들의 이야기, 마크 트웨인 시대의 문학적
잔향들, 스페인 요새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그리고
포보이와 레드 바의 멋과 음악
이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져, 마음에 새로운 울림을 남겼다.
남부의 시간은 느리지만, 그만큼 오래 머문다.
다채로운 문화와 깊은 역사, 온화한 사람들의 환대가 얽혀
이해를 넘어 포용이 되는 곳.
이곳에서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조금 더
유연해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시시피를 건너, 바다를 품은 길 위의 여정은 근사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여행은 네가 살아갈 세계를 확장시키는 훈련이란다.
이제, 마음껏 비상하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