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텔레비전이 거실 한편에 고급 ‘가구’처럼 놓여 있던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사 남매가 모여 만화 영화를 보곤 했다.
화면에서 익숙한 오르간 선율이 흘러나왔고, 파트랴슈가
가난하지만 착한 소년, 네로와 함께 들판을 달린다.
하지만, 결말은 슬프게 마무리되었다.
차디찬 성당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네로의 얼굴에 번져있는 고요한 미소.
1975년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만화 영화는 눈물로 얼룩진 동심의 클래식이 되었고,
나 역시 그저 슬프고 애잔한 이야기로만 기억했었다.
그러나 훗날 유럽의 예술과 회화를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나는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였다.
안트베르펜 대성당 제단에 걸린 이 두 작품은
바로크 회화의 정수이자,
인간 고통과 신성의 경계를 묘사한 역작이다.
루벤스 특유의 역동적 구도와 격정적인 명암,
고통 속에 깃든 숭고함은
성화(聖畫)의 경지를 넘어 한 시대의 영혼을 담아내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의 성당 안 그림은 천에 덮여 있었고,
돈을 내야 볼 수 있었다.
네로는 그 앞에서 완전히 힘이 빠진 몸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죽음이 임박한 네로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피어났다.
인간 존재의 가장 순전한 기도를 품은 안도의 미소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플란다스’라는 이름은, 실제 지명인
‘플랑드르(Flanders)’를 일본식으로 음역한 것이다.
영국 작가 위다(Ouida)가 1872년에 발표한 원작 소설
《A Dog of Flanders》는 1975년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그 표기는 그대로 한국에 전해졌다.
정확히는 ‘플랑드르’가 맞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플란다스’라는 이름 속에는 1970년대 특유의 시대 감성과 매체를 통해 공유된 대중의 감정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 감정의 중심엔 네로와 루벤스의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화가들의 화가로 알려진 루벤스는 플랑드르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고,
네로는 플랑드르에서 화가를 꿈꾸던 어린 소년이었다.
마침내 성당 안에서 네로가 마주한 루벤스의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천으로 가려져 있던 그 거대한 화면이 천천히 드러날 때,
죽음을 앞둔 소년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예술이 인간의 삶에 건네는 마지막 위로였고, 한 소년의 순수한 열망이 이룬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예술을 향한 사랑이 생의 마지막 순간조차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네로를 통해 깨닫게 된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일지라도,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눈을
감은 <플란다스의 개>의 이 장면은
진정한 예술의 감동이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현실보다 더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