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스의 이른 아침. 공항 활주로 위로 번져가는 빛을 보며 아들과 나는 플로리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이애미.
‘휴식’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명랑하게 들리는 도시도 드물다.
남국의 태양, 라틴의 리듬, 그리고 가장 쿠바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이번 여행은 짧지만 짙은 경험을 예감케 했다.
창밖으로 플로리다 해안선이 드러날 즈음, 내 마음은 설렘과 긴장, 그리고 뭔가 말을 걸어올 듯한 따뜻한 직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여름휴가가 아니었다.
작은 아들이 출전하는 피칭 쇼케이스가 포트로더데일(Fort Lauderdale)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꿈과 열정이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빛날 무대였다.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픽업하자마자,
시내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카리브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이들의 문화가 층층이 쌓인, 다채롭고 관능적인
도시였다.
야자수가 도열한 도로, 파스텔빛 외벽을 자랑하는 아르데코 건물들, 가벼운 라틴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들 사이로
도시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이애미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다.
도심 곳곳에는 쿠바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리틀 하바나(Little Havana) 골목 어귀에서는
지금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점심은 쿠바식 샌드위치와 마두로스(익은 바나나 튀김)를
곁들인 전통 하바나 플레이트로 채웠다. 낯선 음식이었지만, 입 안에 퍼지는 향신료와 뒷맛의 깊은 단맛이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해변에서 산책을 즐기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8번가, ‘칼레 오초(Calle Ocho)’에 차를 세우고
‘베르사유’라는 하바나 스타일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고기 육즙이 풍부하게 배인 ‘로파 비에하(Ropa Vieja)‘와
블랙빈 라이스, 그리고 설탕이 듬뿍 들어간 쿠바식 커피
카페시토를 마시며 마치 쿠바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에
행복했다.
다양한 라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도시,
그것이 마이애미의 매력이다.
달빛 아래, 담배를 말고 있는 할아버지와 짧은 눈인사를
나누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여행이란, 아주 잠깐 동안 다른 문화와 역사 속에 스며보는 것이 아닐까?”
다음날 아침, 쇼케이스가 열리는 포트 로더데일로 향했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야자수와 머리 가까이 내려온 듯한 하늘이 이국적인 향수를 맘껏 발산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야구장을 찾았고, 마운드에 서 있는 아들.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공을 던지는 모습이 유난히 단단해 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릴 적, 집 앞
공원에서 처음 캐치볼을 시작하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놀이였지만, 이제는 아이의 삶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피칭이 끝난 후, 아들은 묵직한 공 하나를 내게 건넸다.
“오늘, 내 최고 기록 나왔어요.”
나는 그 말에 말없이 웃으며, 공을 받아 가방 깊숙이 넣었다.
이 공은 우리의 기억이었고, 언젠가 내 마음을 다시 흔들
소중한 물건이 될 터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보카라톤(Boca Raton) 해변으로 향했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이 도시는 플로리다 동해안에서도 유독 다채로운 색깔을 띠며 우아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저녁노을이 바다와 접하는 순간, 붉게 물든 수평선이 말을 걸어왔다. 아들과 나는 모래 위를 나란히 걷다가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나에겐 이런 평온함이 필요했고, 아이에게도 그러했으리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런 상상을 했다. 훗날 이 아이가 야구선수가 되든, 아니든, 오늘 이 바다와 햇살, 마운드 위에서의 기억이 그의 내면 어딘가에 작게나마 오래 남기를.
그렇게, 삶을 견디게 해주는 무엇이 되기를.
마이애미에서 보카라톤까지.
그 길 끝에는, 열정과 사랑이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