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시대의 거울이다.
우리는 교육의 방식을 통해 그 시대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요즘 교실에서는 학생의 인격과 사생활 보호가 최우선 가치로 여겨진다. 교사는 학생의 감정을 헤아리고, 지나친 간섭이나 훈육을 자제해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때로는 교사에게 ‘지적 당하지 않을 권리’조차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교육 방식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학생이 2학년 선배를 만나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복종심과 겸손함을 생활의 미덕으로 몸에 익히는 것이 기본 예절이었다.
당시의 교수는 학생의 지적 역량을 칭찬하기보다는 도덕적 결함을 교정하는 데 집중했으며,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한
규율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이끌어내려 했다. 학생은 배움을 통해 지식뿐 아니라 수양을 배우고, ‘사람다움’을 익혔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교육의 모범적 사례로 꼽히는 사제지간이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강의실이 아니라 광장의 대화 속에서
플라톤을 이끌었고,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지켜본 뒤,
자신의 철학 속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고스란히 심었다.
두 사람은 권위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 ‘정신적 계승자’로서의 사제관계를 형성했다.
동양의 예로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과 제자
기대승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퇴계는 제자와 8년에 걸친 서간토론을 통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기대승은 스승의
논지를 비판하고 수정했으며, 퇴계는 이를 너그러이
수용하고 토론의 장을 확장했다.
‘스승은 정답을 주는 자’라는 통념을 넘어서,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동반자로서의 사제관계를 이룬 것이다.
교육은 언제나 시대의 요청에 반응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사람다움’을 길러내는 교육의 본질까지 바뀌어야 할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자유롭고 유연한 교실은 단연 진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스승과 제자의 ‘존경과 수양’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되새기지 않는다면, 교육은 단지 기술 전달의 장으로 퇴화할 위험도 있다.
배움이란 결국 인격을 닦는 일이다.
스승이 삶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제자가 고개를 숙이며
마음을 여는 그 순간—그곳에 교육의 진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