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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그림자를 걷다

by 김지향

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시계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하지만 그 바늘이 가리키는 것이 ‘실제의 시간’인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시간의 모형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바다의 파도를 손으로 붙잡으려는 시도처럼,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의 흔적을

숫자로 기록한 것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수(數), 그리고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척도”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시간은 세계 안의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움직임이 없다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간은 사물의 변화가 남긴 자취였다.


반면 뉴턴은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했다.

그의 우주에서 시간은 절대적이며,

공간과는 독립된 강물처럼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사람이 있든 없든, 사건이 일어나든 아니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우주 자체가 소유한 시계였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이 강물의 흐름을 뒤틀었다.

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직물처럼 엮여

있으며, 속도와 중력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고 밝혔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은, 다른 위치와 속도의

누군가에게는 이미 ‘과거’이거나 ‘미래’일 수 있다.

시간은 고정된 강물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휘어지고

늘어나고 수축하는 유연한 천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갈릴레이 역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그는 시간은 오직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즉, 우리가 관찰하는 방식이 바뀌면 시간의 흐름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나 역시 언젠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거닐 때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한쪽에는 15세기 르네상스 초상화가,

그 옆에는 19세기 인상주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물감이 마른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그림 속 인물과 풍경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점이 맞닿은

원처럼 인식된다.

수백 년 전의 화가와 지금의 내가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플로리다 데스틴 해변에서 맞이한 일몰이

그 감각을 완성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태양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때, 나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깊이’를 느꼈다.

파도는 과거에서 현재로 밀려왔고,

빛은 미래에서 현재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잠시 시간이라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부유물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바닷속에 잠긴 한 점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정의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미래의 과학이 새로운 우주의 구조를 밝혀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의 개념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며,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시간은 우리의 발자취를 조용히 옮겨 적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 기록의 마지막 페이지에 닿을 때, 시간은 미소 지으며 속삭일 것이다.

“네가 걸어온 길이 바로 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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