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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로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동안,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여러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느냐 ‘는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과 동료 연구자들이 그 비결을 궁금해했고, 한 번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연구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발신자는 자신을 국가정보원(구 안기부)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안기부‘라는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미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NIS)> 으로 개칭된 기관이었는데, 여전히 ’ 안기부’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 안기부‘라는 명칭을 더 잘 알아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라고 덧붙였다.
일주일 후, 그는 내가 근무하던 외국 문학 연구소로 직접 찾아왔다. 반국가적 행위를 한 적이 없었던 나는, 그가 희귀 언어 구사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미국 CIA가 다국어 구사자를 양성하고 활용하듯, 한국도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첫마디로 던진 말은 다소 놀라웠다.
“국정원에서는 각 언어별로 전문가들의 등급을 매겨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단연 0 순위이십니다. 유학 기간도 다른 분에게 비하면 매우 짧은데, 세르비아 대사께서 선생님이 원어민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학문과 실용 언어 습득의 차이를 설명했다. 나의 언어 학습 철학은 간단하면서도 명확했다.
내가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 하나가 ‘성근습원‘, 즉, 본성보다는 습관이 더 큰 차이를 만든다’는 뜻이다. 언어 습득에서도 선천적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 습관, 그리고 몰입이다.
나는 단순히 문법과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 언어를 체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의 조합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단어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라며 감탄을 하였다.
이는 단순한 단어 암기가 아니라, 언어의 맥락과 역사적 배경까지 이해하려 노력할 때 비로소 그 언어는 살아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 학습을 노동처럼 여기면 결국 끝없는 암기의 연속이 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의미의 층위를 파헤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연결 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언어 학습은 더 이상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탐험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습득 속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학습자는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이러한 철학 덕분에, 나는 단순한 언어 학습자가 아니라 문화적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나의 연구실로 찾아온 국정원 직원은 내 설명을 흥미롭게 듣고 메모하며, 결국 깊은 감탄을 표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나는 여러 국가 기관과 기업등에서 언어 전문가이자 통역가로 활동하며 국가 정상들, 기업 CEO, 국제적 인사들과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