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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과의 대화: 대기업 총수에게 배운 삶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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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향

인문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나 예술인을 만날 기회는 많지만, 기업인, 특히 한국 경제를 이끈 대기업 총수들을 만난 경험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다.

그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삶과 성공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1980년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여러 차례 굴곡을 겪고 계셨고, 나는 4남매의 장녀로서 가정의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대학 진학 후에는 나의 꿈을 실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학금을 받아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 안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의 노력은 늘 운 좋게 빛을 발했다. 4년 내내 학과 수석을 유지하며 조기 졸업 요건까지 갖추었지만, 내가 해당 전공의 1기생이었기에 선행 수업을 나 만을 위해 개설할 수 없다는 학교 측 사정으로 조기 졸업의 기회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장학금을 꾸준히 받으며 경제적 독립을 이룬 것만큼은 큰 자부심으로 남았다.

내가 받았던 장학금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 것은 현대 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아산 재단 장학금이었다. 정 회장은 “교육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신념 아래, 단순한 금전적 지원을 넘어 장학생들을 현대 그룹 본사로 초대해 직접 멘토링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소수의 학생들만 초대되었기에 원한다면 직접 질문할 기회도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당돌하게, 아니면 철없이,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인데, 외할머니께서 정주영 회장의 사모님과 동향이라 두 집안이 가깝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외삼촌들과 이모까지 모두 현대그룹에서 근무했기에 나는 마치 ‘이웃집 아저씨‘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기업 총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친근한 이야기를 꺼냈고, 정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께서 사랑을 많이 주시고 키우셨나 보네. 자네 자신감이 참 보기 좋아.”

그때가 내가 대학 졸업반이었으니, 어린 나이에 한국 경제를 이끈 거인과 나눈 대화는 지금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유학 생활 중에 나는 또 한 명의 경제 거인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대우 그룹의 고 김우중 회장.

당시 대우 그룹은 유럽에서 자동차 사업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도 지사를 세우던 시기였다. 나는 학창 시절 김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그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당시 대우 지사장 댁에서 마련된 식사 자리였으므로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질문까지 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기업 총수라면 강한 카리스마와 거리감이 느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매우 인자하고 부드러우며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당시 석사 과정 중이었고, 기업 경영과는 거리가 먼 인문학도였다. 하지만 그는 ‘김 선생’이라는 깍듯한 호칭을 사용하며 나를 존중해 주었고,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먼 유럽까지 온 용기를 칭찬해 주었다.

그의 겸손함과 열린 태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업의 크기나 경제적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열린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순간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자신감을 가져라”, 김우중 회장의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태도는 내 삶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기업인이든 학자든,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점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도전하는 태도, 그리고 겸손함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때의 만남이 지금까지도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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