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 쫓기지 않는 삶을 위하여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레 미제라블의 이 대사는 세기를 초월해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들 인생의 속도를 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10대에는 10km/h, 20대에는 20km/h,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50대에는 50km/h 로 달리다가 그 후로는 마치
스포츠카처럼 하루하루가 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 속도에 휩쓸리는 동안,
우리는 정말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다.
“하루의 3분의 2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대부분의 현대인은 하루 7~8시간을 노동으로 보낸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시간을 통제할 권리를
잃어간다.
은퇴하는 시기까지 사회의 잣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일까?
장폴 사르트르는 자유를 단순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인간은 자유로움을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자유롭지 않은 이유는 외부 조건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흐름 속에서 자동 조종 모드로 살아가게 된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삶의 의미”를 탐구해 왔고, 그 답 중 하나로 ‘주체적인 삶’을 제시했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방향을 정하는 삶을 말한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로 “시간의 주도권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낄 때 삶의 만족도가높아진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역시 ‘이스털린 패러독스’를 통해 비슷한 통찰을 제시했다.
소득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더 많은 부는 삶의 질을 크게
높이지 않는다. 즉, 임계치를 지나면 행복도와 소득이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가치를 두는 활동을 하고,
삶의 속도를 조절할 때 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으로 사는 삶이란,
외부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따져봐야 한다.
내가 가고 있는 트랙 위에서 나는 시간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한다.
안정된 길과 원하는 길 중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지 물어야 한다
진정으로 사는 삶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도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이 그가 써온 모든 작품은 이에 비하면 모두
헛된 것이었다고 극찬한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의 2장 첫 문장은 너무도 강렬하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
성공을 향해, 목표를 향해 산을 오르듯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에는 죽음만 남게되었다는.
나를 돌아보고 끈임없이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사는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