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왜 이른 아침 등교를 강요하는가?
아침 8시.
학교의 종소리는 항상 같은 시간에 울린다.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책가방을 메고 교문을 지나간다. 어떤 아이는 서둘러 교실로 뛰어가고, 어떤 아이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이다.
그럴때면 난 이런 의문을 갖는다.
“왜 학교는 아침 8시에 시작하고, 오후 3시면 끝나는 걸까?”
어릴 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해가 뜨면 학교에 가고,
오후가 한참을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게 그저 당연한 건 아니었다.
이 시스템의 시작은 산업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도입되던 시기,
공장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보호할 ‘장소’가 필요했다.
학교는 단순한 배움터를 넘어, 아이들을 한동안 맡아주는
‘보호 시설’ 역할을 했다. 일정한 시간에 등교하고
하교하는 것은 부모들의 노동 스케줄에 맞춰진 것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이런 시스템이 ‘학습’보다는 ‘관리’에 더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학교는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고,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고,
일정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든다.
마치 공장 노동자들이 시계에 맞춰 출퇴근하는 것처럼.
나는 개근상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비가 많이 오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엄마는 망설임 없이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럴 때면 직접 공부를 가르쳐 주셨고, 나는 학교보다 집이 더 편하고 좋았다. 물론, 가끔은 꾀병도 부렸다.
아침에 이불 속에서 기침을 한 번 하면, 엄마는 이마를
짚어보며 “오늘은 그냥 쉬자”라고 말해주셨다.
그렇게 허술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엄마 덕분에
나는 ‘완벽한 학생’은 되지 못했지만, 내 몸과 기분을
살피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개근상을 받기 위해 아파도 참고 학교에 나가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감기 몸살에 시달리면서도 개근상을
받겠다고 이를 악물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개근상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틀을 바꾸는 최초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개근’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배우는 방법 자체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래서 대안은 뭐죠?”
사실, 영화나 문학 속에서도 기존의 교육 방식을 벗어난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다.
예를 들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시를 읽고, 글을 쓰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꾸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또한,J.K 롤링의 <해리 포터>에서도 호그와트의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협동과 문제 해결 능력을 익힌다.
과목도 단순한 ‘수학’이나 ‘영어’가 아니라,
‘어둠의 마법 방어술’ 같은 실용적인 과목이 많다.
현실의 학교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학습 환경이다.
이런 접근이 더 자연스러운 배움이 아닐까?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학습.
70~80년대만 해도,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이 보장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대학 졸업장이 있다고 해서
평생 직업이 보장되는 시대는 더 이상아니다. 다행히도.
오마에 겐이치는 그의 책 <난문쾌답>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의 시대에 가장 강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빨리 배우는 사람이다.”
이제는 평생 학습이 당연해졌다.
우리는 한 가지 전공만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계속 익히며 변화를 따라잡아야 한다.
학교가 이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을까?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을까?
학교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개근상이나 성적 같은 기존의 잣대를 넘어, 학생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는 어릴 때 개근상을 받지 않았다.
아프면 쉬었고, 학교보다 집에서 배우는 날도 많았다.
그런 어린 시절 덕분에, 나는 학교의 틀 바깥에서도
배움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아침 8시면 같은 종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종이 울리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배우는 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