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것들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나의 아주 어린 시절, 봄을 맞이하는 풍경이 있었다.
부모님께선 봄이 되면 집 안 곳곳에 화사한 빛깔의 꽃이
담긴 화분을 들여 놓으며 봄을 맞이 하셨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좋아하시던 나무는 단연 동백이었다.
붉은 꽃잎을 가진 동백은 겨울 끝자락을 지나 피어나기에,
나에게는 봄의 문턱을 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봄맞이를 하는 풍경은 내게 ‘새로운 시작’,
‘생명의 재생‘, 그리고 ‘변화와 성장‘이라는 단어들을
자연스레 심어주었다.
봄은 늘 내 감정의 결을 바꾸는 계절이었다.
해가 길어지고, 공기엔 생기가 감돌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걸 보며 마음 속 어딘가가 기지개를 켜듯
느슨하게 풀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봄을 기다리게 만든 건, 장미였다.
어릴 적 나는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 영화를 좋아했다울타리 너머 혹은 들 한쪽에 피어있는 들장미를 보면
언제나 설렌다.
들장미를 보면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한 송이 장미꽃에서 세상을 보고, 한 줌의 모래에서 천국을 본다.”
작고 연약한 생명 속에서 거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닐까?
“봄은 그런 계절이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빛이 바뀌고,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뭔가가 마음 안에서 기지개를 켠다.” 는 하루키의 문장처럼.
천천히 다가와 우리 안의 잊고 있던 것을 깨운다.
겨울 동안 스러졌던 것들이 뿌리 아래에서 다시 피어나고,
다시 살아나기 위해 자신을 흔드는 시간이다, 봄은.
철학자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인간의 기억이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라 했다.
그리고 그 집 안에 놓인 책들과 꽃병, 화분들,
특히 동백 나무와 들장미는 나에게 감정의 연대기를
기록하게 만드는 ‘식물의 시학’이었다.
지금도 종종 동네 마켓안 한켠에 자리한 꽃 장식이 즐비한
섹션에서 한참을 서성댄다.
그리고 한다발의 꽃을 집어 들때면, 어릴 적 들장미 곁을
서성이던 내 안의 소녀를 만난다.
계절은 지나가고, 꽃은 지지만,
기억은 늘 그렇게 향기로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