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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느려서, 오히려 멀리 간다

작은 일에 집착하지 않기

by 김지향

며칠 전이었다. 한켠에서 쌓여가던 책 무더기를 정리하다가,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오래된 노트를 하나 발견했다.

오래전 교양 과목을 강의할 당시 학생들과 함께 한 세미나의 기록이었다.

그중 한 페이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교수님, 저는 왜 늘 중요한 걸 놓치는 걸까요.

작고 사소한 일엔 집착하면서요?“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항상 앞서서 계획을 세심하게 세우고.

기한을 하루도 넘기지 않던 성실한 학생.

수업이 끝나고도 질문으로 나의 걸음을 묶어두던 학생.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성과가 그리 나타나지 않는다고

자주 고민을 털어놓았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두렵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 학생에게 ‘조금 흐릿하게 살아보라’고 말했다.

삶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지가 아니니까.


시간이 흘러, 나는 폴 오르팔레아(Paul Orfalea)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카피 체인 킨코스(Kinko’s)의 창업자.

그는 난독증과 ADHD라는 이름표를 달고도 전 세계에

1,200개가 넘는 매장을 일궈낸 인물이다.

오르팔레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은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 근처에서 작은 복사 가게로 시작해 독특한 파트너십 모델로 회사를 성장시킨

노하우를 깨닫게 하는 문장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말처럼 철학을 현실의 사례로 만든 인물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성장형 사고방식을 통해 성공으로

이끈 스토리는 늘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 옛날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학생.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작은 일에 대한 집착’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오늘 이메일을 늦게 보낸 것,

카톡에 바로 회신하지 않은 것,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못한 것 따위로 자책하며

하루를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삶을 더 넓게 보기 위해서는 때로 ‘지나침’을 허락해야 한다. 그리고 ‘결핍’을 탓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 누군가 ‘너무 산만하다’, ‘너무 느리다’,

‘너무 조용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너무’들이 모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만의 문장이 된다.

누군가의 눈에는 어색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뭐 중요한가.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가능성은 무한으로 열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때론 그냥 살아보자.

나만의 큰 그림을 그려가면서 오르팔레아처럼.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아직 흐릿하게 보이더라도,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뚜렷한 선명함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방향’ 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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