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랑하라, 세상이 색으로 물들도록
이 컨텐츠는 곧 출간될 그림과 영화의 달콤쌉싸름한 만남, <명화남녀> 두번째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발간에 앞서 몇가지 이야기를 먼저 전해드리고 있으며 총 10회로 구성됩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드시면 7pictures 홈페이지에서 <명화남녀> 프로젝트를 공유하세요. 공유만 해도 명화남녀가 무사히 발간될 수 있게 1000원 후원이 되고, 책 선물을 추첨을 통해 드립니다.
그림에 빠져버린 여자와,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의 팟캐스트 이야기
목차
1 파랑은 빨강보다 뜨겁다.
2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3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
4 사랑 그 후
5 파란색은 따뜻하다.
6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 “피카소, 또… 피카소”
7 청색 시대에서 장밋빛 시대로
* 7편의 목차 중 3편을 선 공개합니다. 3-4분 정도 소요되는 글 입니다.
이혜정 : 오, 사정해요/따라가도 될까요?/오, 왜 항상 안 되나요?/내 유일한 존재, 내가 걷는 물이 돼줘요/당신은 깊고 거칠게 흐르는 나의 강/나 따라가요, 그대를 따라가요, 깊은 바다로/그대를 따라가요/나 따라가요, 그대를 따라가요, 어두운 파멸로/그대를 따라가요/그는 메시지, 나는 도망자, 그는 반역자, 나는 그대를 기다리는 딸/당신은 깊고 거칠게 흐르는 나의 강…….「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삽입됐고 리케 리(Lykke Li)가 부른 「I Follow Rivers」예요. 노랫말이 참 정직하게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 분)의 심정을 전달하죠.
한기일 : 아델이 생일날 이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있습니다. 화면도 참 예쁘게 나왔지만, 아델이 춤을 참 잘 춥니다.
이혜정:시작부터 샛길로 빠지나요^^ 이번에 이야기할 영화는 압델라티프 케시시(Abdel Kechiche Abdellatif Kechiche) 감독의 201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가장 따듯한 색, 블루」예요. 제목부터가 참 의미심장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블루, 즉 파란색은 차가움을 상징하는 색인데 말이죠. 역설적인 제목이라고나 할까요?
한기일 : 불이 연소될 때 붉은 불보다 파란 불이 더 뜨겁다고 합니다. 상징성으로 보면 파란색이 차가운 느낌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파란색은 뜨겁다’라고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혜정 : 사실상 이 영화는 제목이 두 개라고 봐야죠.
한기일 : 국내 제목과 영어 제목은 「가장 따듯한 색, 블루」(이하 「블루」)지만, 프랑스에서 원제는 「아델의 삶 1부와 2부」입니다.
이혜정 : 원제를 보면 이 영화는 아델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 같아요. 영화의 원작이 있죠. 원작의 제목은 《파란색은 따듯하다》예요. 제목을 파격적으로 바꾼 느낌이에요.
한기일 : 저는 원작이나 국내 제목도 좋지만, 영화를 보면서 영화 자체에는 케시시 감독이 붙인 제목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델의 삶’의 격정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탐구한 1부와 2부의 감정 관찰 보고서 느낌이랄까요?
이혜정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줄거리 소개를 부탁드려요.
한기일 : 아델은 프랑스의 대문호 피에르 드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의 일생》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파랗게 머리칼을 염색한 대학생 엠마(레아 세이두 분)와 마주치고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우연히 재회하죠. 그날 이후 아델과 엠마는 서로를 기억하며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혜정 : 줄거리만 보면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같지만 엠마가 여성이잖아요. 영화 속 동성애라는 화두가 개봉 전후로 끓임 없이 논란과 화제가 됐던 작품이고요.
한기일 :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그래픽노블 《파란색은 따뜻하다》가 원작입니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독자상’, 알제만화축제 ‘최고 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영화를 본 뒤 원작인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듯하다》를 읽었어요. 작품의 완성도가 꽤 높습니다. 원작과 영화는 설정이나 에피소드 등이 비슷하지만 저는 별개의 작품으로 느꼈습니다. 구성은 물론 추구하는 감성의 본질도 다르고,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도 다릅니다. 원작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클레망틴이에요. 원작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심도 깊게 다룹니다. 클레망틴과 엠마의 사랑에서 파생되는 외부적 갈등과 클레망틴의 내적 요소들이 작품의 큰 축을 담당하죠. 반면 영화는 동성애라는 설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동성애 자체보다는 아델과 엠마의 ‘사랑’에서 파생되는 사건들에 더욱 집중합니다.「블루」는 정서적 감정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사랑을 해봤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관객들에게 밀착시켜서 전달하는 효과가 매우 탁월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정을 추스르는 분도 주변에서 여럿 봤어요.
이혜정 : 저도 그랬어요. 반면 기일 씨는 영화에서와 같은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추체험하고 싶다고 했죠.
한기일 : 그런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혜정 : 그리고 아델이 생각해낸 결과는? 친구와 함께 게이 바를 가는 것이죠.
한기일 : 아델에게 이곳은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상투적이지만 게이 노인이 아델에게 해준 이야기가 인상적이죠. “사랑에는 성별이 없지. 누구든 찾아봐. 사랑하면 그만, 행복하면 다지. 진실된 사랑이면 내일 죽는다 한들 어때.”
이혜정 : 그의 말을 듣고 아델은 한층 용기를 얻어요. 그리고 건너편 레즈비언 바로 향하죠. 거기서 운명의 그녀인 엠마와 재회하고요.
한기일 : 자신이 원하는 본질 추구를 시도한 결과 운명의 그녀와 재회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제부터 아델은 엠마의 파란색에 거침없이 물들기 시작하죠.
이혜정 :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는 거야. 태어나자마자 존재는 있지만 본질은 행동으로 만들어나가는 거지.” 엠마가 아델의 초상을 그려주면서 인용한 사르트르의 말이에요. 엠마는 아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돼요. 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해방감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곧 사회적 편견에 부딪히죠.
한기일 : 엠마를 만나고 온 아델을 향해 친구들이 레즈비언이라며 비난합니다. 하지만 아델의 내적 자아가 혁명 과정에서 겪는 소규모 충돌 정도로만 묘사됩니다. 원작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훨씬 폭넓고 전면적으로 부각하는 반면, 영화는 이 지점에 대한 논쟁을 키우지 않고 사랑을 통한 감정 묘사에만 집중하겠다는 노선을 이 신부터 확실하게 굳힙니다.
이혜정 : 그 후 펼쳐지는 아델의 삶 1부의 후반부는 격정적인 사랑의 연속이에요. 아델과 엠마의 정사 장면은 극장 안 관객들이 모두 숨죽이고 봤던 것 같아요. 지나치게 긴 듯도 하고요.
한기일 :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단순히 시청각적 자극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만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대화가 바로 몸으로 하는 대화잖아요. 몸의 대화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궁극적인 행복이자 쾌락입니다. 이 영화의 베드신이 도입부부터 절정까지 다소 길게 느껴질 정도로 자극적이고 관능적으로 연출된 것은 사랑의 감성이 다다를 수 있는 본질을 깊이 표현해내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혜정 : 베드신 연출 때문에 레아 세이두와 케시시 감독이 심각하게 충돌했다고 들었어요.
한기일 : 사실 이런 장면은 제정신으로 찍기 정말 쉽지 않겠죠. 아무리 연기라지만 스트레스도 엄청날 테고요. 하지만 멋지게 완성된 장면을 보자면 두 배우의 프로페셔널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엄지손가락 두 개로는 모자라죠.
한기일 : 색 이야기를 해볼까요. 정확한 통계를 낸 적은 없지만 제 ‘기이버 지식’에 따르면, 레드를 제외하면 블루만큼 자주 그리고 많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색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혜정 : 저는 개인적으로 블루를 정말 좋아해요. 검정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옷이나 가방, 소품이 블루 계열이에요.
한기일 : 혜정 씨가 생각하는 블루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이혜정 : 일단 저한테 잘 어울리고요^^ 아시다시피 색상환표에서 보면 빨강․주황․노랑은 파장이 긴 난색에 속하고 파랑은 반대로 한색에 속해요. 기분 상으로는 영어로 ‘Feeling Blue’라고 하면 우울하다 는 뜻이고요. 어원이 확실치는 않지만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도 영국의 극작가 조지 콜먼의 《블루 데빌스Blue Devils》에서 가져왔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해요. 블루 데빌스, 우울과 슬픔을 뜻하죠.
한기일 : 보통은 블루가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주죠.
이혜정 : 그런데 이론과 실제가 참 다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별이 빛나는 아를의 밤하늘이 결코 차갑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여름밤인 듯 열기가 느껴지고 환상적이었어요. 샤갈도 푸른색으로 유명한 화가죠.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는 샤갈의 푸른색을 보면 우울하다거나 차갑다기보다 오히려 신비롭다는 느낌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어요. “우리는 눈으로 보는 사물의 모습과(즉, 눈에 맺히는 상이겠죠) 그 사물을 인지하고 느끼는 것의 결합으로 하나의 사물을 인식한다.” 세잔의 말인데요.
한기일 : 잠깐만요! 또 저로 예를 들려는 것은 아니죠?
이혜정 : 굉장히 당황하시네요^^ 그렇다면 저로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개인적으로 통통한 체형을 좋아해요. 웬만해서는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개그맨 김준현 씨도 귀엽고 덩치가 좋은 편이지 전혀 뚱뚱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한기일 :기준이 참으로 특이하군요.
이혜정 : 주변에서는 많이 왜곡돼 있다고 하던데 제 생각은 그래요^^ 색도 마찬가지예요. 색 자체의 느낌이 있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감정․욕망․욕구 또는 인식이 결합돼서 색에 대한 인상이 제각각 달라지거든요.
한기일 : 저도 파란 하늘을 보면 포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혜정 : 「그래비티」(2013년 작) 기억나죠? 우주에서 본 지구가 얼마나 파랗게 빛나던가요!
한기일 : 보석처럼 고요하게 빛나던! 결코 잊을 수 없죠. 완벽한 비주얼이었습니다. 혜정 씨가 말하고 싶은 게 파랑이 주는 신비로움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이혜정 : 블루는 맑고 투명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가진 것 같아요. 샤갈의 푸른색은 이론상으로는 어두운 색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밝게 보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 블루는 주변 색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내는 색이에요.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피카소는 “파랑은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는 색”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빨강이 차가운 느낌을 주지는 못하지만 블루는 상황에 따라 따뜻한 느낌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고 다층적 의미를 생성해낼 수 있죠. 신비롭고 매력적인 색이에요. 이 영화는 블루를 따뜻한 색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특히 참신하고 독창적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화면을 보면 채도를 굉장히 높여서 파랑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영상미가 정말 뛰어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블루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일 씨가 말한 대로 블루 자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즉 엠마를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기일 :아델이 엠마의 파란 머리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아델에게 블루는 엠마 그 자체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 설령 본질이 그렇지 않더라도 따뜻하게 느끼는 거죠.
이혜정 : 색도 사랑도, 원래는 따뜻한 색이 아니고 따뜻한 사람이 아닌데, 즉 내 본질은 그게 아닌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한테 따뜻함을 느낀다? 영화에서 의미심장하게 쓰였던 사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이 이렇게 연결되네요.
한기일 : 멋진 해석인걸요! 저는 그 대사를 동성애에 국한해서만 생각했는데, 즉 본질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끌리는 실존이요. 그런데 색에서 시작해서 사랑의 본질과 실존으로까지 연결하는 혜정 씨의 해석이 훨씬 울림이 깊습니다. 혜정 씨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지점인 것 같아요.
이혜정 : 스승이 훌륭해서죠^^ 한기일과 2년이면 이 정도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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