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사랑과 우정 사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곧 출간될 그림과 영화의 달콤쌉싸름한 만남, <명화남녀> 두번째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발간에 앞서 총 10회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립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7pictures 홈페이지에서 <명화남녀> 프로젝트를 공유하세요. 공유만 해도 명화남녀가 무사히 발간될 수 있게 1000원 후원이 되고, 책 선물을 추첨을 통해 드립니다.
그림에 빠져버린 여자와,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의 팟캐스트 이야기
목차
1.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할까
2. 사랑일까 우정일까
3. 미술관 데이트
4. 유럽과는 다른, 미국 미술관 탄생의 비밀
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
* 5편의 목차 중 2편을 선 공개합니다. 3-4분 정도 소요되는 글 입니다.
이혜정 : 2015년 봄에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설문 조사를 했어요. 그중 ‘친구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라는 항목에 ‘그런 적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무려 88.6퍼센트였다고 해요. 기일 씨는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이 결과대로라면 남녀 사이에는 우정이 불가능하다라는 의미가 되잖아요. 기일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기일 : 이번 편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년 작)입니다.
이혜정 : 절묘하게 빠져나가려 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벌써 27년 전 작품이라니 놀라워요. 25주년을 맞았을 때 뉴욕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열렸다고 해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랑 받는 영화예요. 1990년대 이후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정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한기일 : 거의 10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보는 내내 미소를 지었습니다. 전혀 촌스럽지 않고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이 영화가 높이 평가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녀 관계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근본적인 질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혜정 씨가 처음 제가 물었던 ‘과연 남녀 사이에 진정한 우정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아주 잘 풀어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두 캐릭터를 정말 공들여 완성했어요. 혜정 씨가 보기에 해리는 어떤 남자인가요?
이혜정 : 일단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한기일 : 해리(빌리 크리스탈 분)는 남녀 간의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의견이 확실한 캐릭터입니다. 마초적인 면도 상당히 많지만, 그렇다고 아주 마초적인 캐릭터는 아니에요. 캐릭터를 구축하는 주변 설정들을 좀 살펴볼게요. 먼저 해리는 남성 대부분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아주 좋아합니다. 뉴욕에 있는 거의 모든 스포츠 팀을 좋아해요. 친구인 제스(브루노 커비 분)와 이혼 이야기를 하는 곳은 뉴욕 자이언츠 홈경기장이고, 농구 팀 뉴욕 닉스를 언급합니다. 툭하면 뉴욕 양키즈의 모자와 의상을 입어요. 실제로 빌리 크리스탈이 뉴욕 양키즈의 광팬이기도 합니다.
이혜정 : 영화에서 대개 마초적인 캐릭터들이 스포츠를 좋아하죠.
한기일 : 친구인 제스에 비하면 해리는 덜한 편입니다. 둘이서 야구 배팅을 하는 장면을 보면, 해리가 지난번에 섹스한 여성이 고양이 소리를 냈고 그 이야기를 샐리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친구인 제스는 섹스할 때 고양이 소리를 내는 여자에게만 온통 관심이 있거든요.
이혜정 : 남자들끼리 나누는 대화의 단순함을 잘 포착한 장면이었어요. 어린아이가 따로 없어요. 이래서 남녀가 연애하는 게 어려운 거예요.
한기일 : 그냥 딱 봐도 어린아이죠. 해리가 배팅 볼을 치는데 뒤에서 기다리는 꼬마와 실랑이까지 벌입니다. 남자들이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면을 많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해리는 남녀 관계나 사랑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 주관이 확고하고 아주 남성 편협적이지는 않습니다. 영화에서 해리가 읽는 책들을 보면 캐릭터를 보여주는 재미난 힌트들이 보입니다. 총 세 번 나오는데, 샐리(멕 라이언 분)와 뉴욕의 서점에서 만났을 때 읽던 책이 에드워드 암스트롱 베넷의 《한 권으로 읽는 융》입니다. 해리가 시크하게 정신분석을 하듯 남녀 관계를 설파하는 모습을 보면 이 책이 해리의 캐릭터와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이혜정 : 와! 영화 속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또 찾아내셨네요^^
한기일 : 화면 확대하고, 원제 구글링 검색하고…… 신경을 좀 썼습니다^^ 또 SF와 호러의 대가인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감독인 롭 라이너의 다음 작품이 「미저리」(1990년 작)입니다.
이혜정 : 재밌네요. 감독이 보물찾기를 하고 싶었나 봐요.
한기일 : 마지막이 우리나라에도 첩보 스릴러 ‘본’ 시리즈의 원작자로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의 《이카로스 아젠다》입니다. 정신분석 한 권과 사이코 여성을 그린 스릴러 소설, 남성 취향의 정치 스릴러 소설까지 해리의 사고관이나 이혼 당한 당시 심리를 대변하는 설정을 책으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해리가 딱딱하면서도 웃기는 듯한 풍자 개그를 잘 던지잖아요. 그의 독서 목록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혜정 : 저는 서점에서 만난 뒤 카페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고, 그다음 둘이서 뉴욕 거리를 걷던 장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한기일 : 아마 해리의 유머가 처음으로 샐리에게 먹혔던 때라고 할 수 있겠죠.
해리 :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샐리 : 나도 별로였어요.
해리 : 아닐 텐데. 그땐 깐깐하더니 지금은 부드럽네요.
샐리 : 그런 말은 질색이에요. 칭찬처럼 들리지만 시실은 욕이잖아요.
해리 : 좋아요! 여전히 깐깐하시네요!
샐리 : 그때 당신이랑 안 잔 게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내 성격상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군요?
해리 : 사과할 수 있는 법적 시효는요?
샐리 : 10년이요.
해리 : 겨우 턱걸이하겠네요.
샐리 : 언제 저녁이나 같이할래요?
이혜정 : 해리는 참 얄미워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저녁 약속을 받아 내다니!
한기일 : 이후 해리의 대사가 더 대박이죠.
해리 : 이제 친구가 된 건가요? 좋네요! 여자친구! 내가 만난 미인 중에 자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이혜정 : 정말이지 너무 얄미워요. 이 대사까지 들으니 더 그래요. 정말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한기일 : 해리는 얄밉지만 귀엽게 할 말 다하는 캐릭터입니다. 이혼한 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해리는 일반적인 남성들같이 꽉 막힌 유형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는 잘 들어주잖아요.
이혜정 : 미술관이 얼마나 데이트하기 좋은 곳인지 몇 가지 정보를 드리고 싶어요. 보통은 영화관 많이 가시잖아요? 그런데 매번 좋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일단 미술관은 입장료가 영화보다 싸요^^ 서울의 북촌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갤러리나 미술관 중에 3분의 2는 아마 입장료가 없을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5000원이에요. 이게 아마 그 일대에서 가장 비싼 요금일 거예요.
한기일 : 북촌이나 삼청동 쪽은 미술관이 모여 있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데이트 장소로 유명하죠. 독자님들도 근처를 데이트하신다면 미술관도 한 번씩 들어가보시길 권합니다.
이혜정 : 제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제일 큰 매력은 공간인 것 같아요! 미술관은 평소 잠자던 내 몸의 감각들을 자극하는 곳이랄까요. 미술관에 가면 특히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특이한 작품들이 많잖아요.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해석되지 않는 물체와 익숙하지 않은 공간 안에 내가 놓인 것 자체만으로도 내 몸에서 평소와는 다른 반응들이 일어나거든요.
한기일 : 그러고 보니 제 경험이 생각납니다. 미술관을 둘러보는데 도무지 못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있더라고요. ‘이게 뭐야’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울컥한 것인지, 암튼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이 올라오더라고요. 낯설고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이혜정 : 저는 그런 게 참 재미있어요. 평소 하지 않는 생각, 일상의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미술관에서는 하게 되거든요. 데이트 상황에서는 서로 이런 느낌을 나눌 수 있어서 좋고요. 매일 만나서 비슷한 얘기만 하면 심심하잖아요. 물론 그런 감상이 대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편이어서 사람들이 대부분 쓸모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엉뚱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에서부터 창의적인 발상이 자극을 받거든요.
해리와 샐리도 미술관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이 있어요. 뉴욕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자 세계 3대 혹은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에요. 이곳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한기일 : 해리와 샐리가 고대 이집트나 로마 시대 건축물로 보이는 곳에서 데이트합니다. 여기가 덴두어 신전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서 해리가 이상한 악센트를 하면서 샐리에게 따라해보라고 합니다.
이혜정 : 어디 악센트인지 전혀 감이 안 오더라고요. 이 장면에서 해리가 이 덴두어 신전을 보면서 “상형문자는 스핑크스라는 인물에 관한 만화 같다”고 말해요. 이 대사에 특별한 암시가 있거나 기능을 하는 대사는 아니고, 그냥 이 신전을 보고 즉각적으로 든 생각을 말한 거예요. 방금 전에 제가 얘기했듯이 미술관에 가면 평소와 달리 ‘쓸데없는’ 생각들이 샘솟아요. 샐리는 대꾸를 안 하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생각들이 마구 일어나는데 바로 이런 신선한 자극들이 있는 곳, 엉뚱한 즐거움을 주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한기일 : 저는 왠지 모르게 미술관 문턱이 높다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혜정 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미술관 가서 새로운 충격이나 영감들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혜정 : 많은 분들이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이잖아요. 그 나라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 또한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상징적이고도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의 배경인 뉴욕만 해도 미술관․박물관이 아주 많아요. 잘 아시듯이 뉴욕시에는 맨해튼․퀸스․브루클린․브롱크스․스태튼 섬 총 5개구가 있어요. 그리고 맨해튼에만 작은 갤러리들까지 포함하면 미술관․박물관이 약 500개가 있고요.
한기일 : 우리나라 전체 극장수가 500~600개 정도인데 그 조그만 섬에 영화관도 아닌 미술관․박물관이 500개라니! 정말 어머어마합니다.
이혜정 : 예술의 중심이라 할 만하죠? 그리고 단위 면적당 대형 미술관이 가장 많은 곳도 뉴욕이 아닐까 싶어요. 맨해튼만 해도 모마․구겐하임미술관․휘트니미술관․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있어요.
한기일 : 혜정 씨한테는 천국이겠네요^^ 세계 3대 미술관․박물관이라면 일반적으로 파리 루브르박물관․런던 대영박물관․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꼽나요?
이혜정 :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고, 관람객 수로 따지느냐 소장한 컬렉션 수나 질로 따지느냐 하는 기준이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다만 컬렉션 등 종합적으로 따져서 루브르박물관․대영박물관은 논란의 여지 없이 세계 3대 미술관․박물관 안에 들고, 나머지로 어디를 더 포함시킬지가 문제가 되죠. 때로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에르미타주미술관이 여기에 포함되기도 해요. 좀 생소하죠. 또 다른 곳에서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세계 3대 미술관․박물관에 넣기도 하고요.
한기일 :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제외하면 모두 유럽의 미술관들입니다. 미술뿐 아니라 서양 문명의 전통이 유럽이니 이해되긴 합니다만.
이혜정 : 금방 눈치 채셨네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다른 유명 미술관․박물관과는 탄생부터가 좀 달라요. 대영박물관의 경우는 조금 예외지만 루브르박물관이나 에르미타주미술관 그리고 다른 유럽 나라들의 미술관 탄생 배경에는 교회나 왕실이 있어요. 루브르박물관과 에르미타주미술관은 원래 ‘궁’으로 쓰이던 건물이었고, 소장품 역시 왕실과 귀족들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세워졌고요.
한기일 : 예전에는 화가들이 ‘궁정화가’라고 해서 왕실에 소속돼 그림을 그렸죠?
이혜정 : 그리고 더 이전에는 교회에 소속이 됐고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교회나 왕실이 그 그림들을 소유한 거죠. 반면 미국의 미술관, 특히 메트로폴리탄미술관․구겐하임미술관․휘트니미술관․MoMA 등은 유럽의 미술관과는 발전 양상이 조금 달라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산업자본가 계층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대두되는데, 그들이 19세기 말부터 뜻과 자본을 모아 미술관 건립에 참여했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유럽에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은 황폐화되고, 미국은 유럽에 전쟁 물자를 대주면서 급격히 성장했죠. 그사이 미국에서는 J. P. 모건이나 록펠러 같은 어마어마한 자본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유럽의 미술을 사들이고 또 수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오늘날 뉴욕의 주요 미술관들이 탄생할 수 있었어요.
한기일 : 누군가에게는 비극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되는 아이러니한 양상은 역사에서 종종 확인됩니다.
이혜정 : 양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경제대국뿐 아니라 예술의 중심지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어요. 유럽의 미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이주한 거죠.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히틀러는 고전적인 형식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의 미감에 맞지 않는 예술들, 특히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늘 감시의 대상이 됐거든요. 마르크 샤갈․살바도르 달리․막스 에른스트․피에트 몬드리안 등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미국 특히 뉴욕으로 갔고, 미국은 예술가들을 적극 포용했어요.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한 화가들이 미국에서 인정받는 경우도 많이 생겼고요. 당시 뉴욕은 이미 국제도시로서 자율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실험적인 예술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거든요.
한기일 : 전날 혜정 씨가 뉴욕 여행 갔다 와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뉴욕을 샐러드볼에 비유했죠.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 다양한 개성이 각자 존중되더라고요. 예술의 중심이라는 명성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뉴욕은 태생부터가 모든 사람과 모든 예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도시였던 것 같아요.
이혜정 : 현재도 예술가들에게 가장 작업하기 좋은 곳을 꼽으라고 하면 뉴욕이 반드시 포함될 거예요. 특히 자신의 작품세계가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하시는 예술가라면 뉴욕은 받아줄 수 있을지 모르니 뉴욕을 추천해요. 뉴욕에서는 작품 활동을 하다 경찰 조사를 받는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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