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곧 출간될 그림과 영화의 달콤쌉싸름한 만남, <명화남녀> 두번째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발간에 앞서 총 10회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립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7pictures 홈페이지에서 <명화남녀> 프로젝트를 공유하세요. 공유만 해도 명화남녀가 무사히 발간될 수 있게 1000원 후원이 되고, 책 선물을 추첨을 통해 드립니다.
그림에 빠져버린 여자와,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의 팟캐스트 이야기
목차
1.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2. 고통도 구원도 독고다이
3. 슬픔의 사람,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거절당했으며 고통당하였다
4. 복수와 구원 사이
* 4편의 목차 중 2편을 선 공개합니다. 3-4분 정도 소요되는 글 입니다.
한기일 : 「올드보이」의 사운드트랙 <In a lonely place>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최민식 씨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한국 영화 O.S.T에 길이 남을 명곡입니다.
이혜정 : 원작 시 자체가 상당히 냉소적이죠. 19세기에 활동한 미국 작가 엘라 윌콕스Ella Wheeler Wilcox의 시 <고독Solitude>의 첫 번째 구절이에요.
한기일 : 박찬욱 감독이 유럽에서 「올드보이」 시나리오를 집필하던 중에 우연히 앉은 커피숍의 머그컵에 이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작품에 활용된 거죠. 시 구절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 알았다고 합니다. “흔해 빠진 경구 같으면서도 냉소적인 뉘앙스가 기억에 남아서 영화에 썼다”고 감독이 직접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이나 비극은 함께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 시를 읽으면 말 그대로 ‘고통은 독고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진짜 삶에서 고통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대수의 묘한 웃음과 이 시의 의미가 묘하게 어울립니다.
이혜정 : 영화 자체가 오픈 엔딩이에요. 해피엔딩인지 배드엔딩인지 알 수 없는,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결말이에요.
한기일 :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겠지만, 저는 배드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유추할 만한 대목들이 아주 많거든요. 시 <고독>에서 차용한 구절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혜정 :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제 맛이죠^^ 결말은 잠시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2003년 작 <올드보이>에 대해 알아볼까요.
한기일 : 「올드보이」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영화 마니아들에게 추앙 받는 작품입니다. 사랑․근친상간․복수 등 여러 주제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특히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즉, 말 한마디의 살벌한 위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혜정 : 유명한 대사죠. “오대수는요… 말이 너무 많아요.”
한기일 : 그렇습니다! 말 많은 오대수는 결국 말 한마디로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인트로에서 오대수의 첫 대사입니다. 강렬하죠. 15년간의 감금을 끝내고 그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말’입니다. 오대수는 장면 그대로 말에 굶주린 수다스러운 캐릭터입니다.
이혜정 : 시나리오를 보면 납치되기 직전에 오대수의 내레이션이 있었어요. “물론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 영화에는 이 대목이 없어요. 오대수는 감금돼서도 입으로 얘기하지만 않을 뿐이지 관객에게 끊임없이 수다를 쏟아내죠.
한기일 :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대수는 직접 대사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내레이션으로 별별 이야기를 다해요. 굳이 횟집 앞에서 물고기 이름에 특성까지 줄줄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감독은 15년의 감금 생활을 겪었음에도 오대수는 여전히 수다스럽고, 말이 많은 인물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내레이션 연출을 활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혜정 : 기일 씨의 말을 들으니 오대수가 말만 앞세우는 인물이라는 설정들이 이제야 보이네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이우진의 개가 되겠다면서 싹싹 빌지만 이우진의 인공 심장을 끌 수 있는 장치를 발견하자마자 그것을 끄려고 시도하죠. 말이 먼저 나오고 행동은 결국 딴판인 인물인 오대수의 끝을 보여주는 장면이랄까요.
한기일 : 네… 하지만 그것은 오대수와 미도가 관계하는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하는 버튼이었죠. 더욱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고통의 파멸의 문을 스스로 연 셈입니다. 결국 오대수는 책임질 수 없는 혹은 무책임한 말들로 스스로 지옥도를 만들어가는 인물이에요. 클라이맥스의 비극이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혀를 잘라서 말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이혜정 : 사실 말 많기로 치자면 이우진도 못지않아요.
한기일 : 감독은 오대수보다 이우진이 더 말이 많은 캐릭터라고 설명합니다. 이우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복수를 위해 복수의 대상보다 더 말이 많고 독해지려 했음을 은연중에 보여줍니다.
이혜정 : 이우진 캐릭터가 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복수를 위해 독해진다는 설정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잖아요?
한기일 : 그 부분은 저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이우진이 원래는 말이 많은 캐릭터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록고등학교 시절 회상장면을 보면 누나 수아(윤진서 분)와의 야릇한 신에서 굉장히 압축된 화법으로 말합니다. “함 보자!” 경상도라는 지역적 특색도 있겠지만, 이 대사에 이우진의 욕망과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결국 이우진은 말을 마구 늘어놓는 캐릭터가 아님을 유추할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복수를 위해 복수의 대상을 연구하고, 그와 동일시하기 위해 오대수의 말 많은 습성을 학습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혜정 : 정말 복수는 사람을 지독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한기일 : 영화에도 나오죠. “상처 받은 자에게 복수심만큼 좋은 처방은 없어요.” 먼저 상처 받은 이우진이 나중에 상처 받은 오대수보다 좋은 처방이었다고 볼 수 있죠.
이혜정 :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고 하지만 「올드보이」는 복수의 완결판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특히 오대수가 자기 혀를 자르는 장면은…… 직접 보여주지 않는데도 정말 보기 힘들었어요.
한기일 : 눈에 띄는 연출이 아주 많습니다만 그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영화 초반부터 강렬한 인상을 던지며 영화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림을 아래에서 위로 죽 훑어요. 그림 자체도 워낙 험상궂어서 뇌리에 바로 박힙니다.
이혜정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이 장면에서 잠깐 눈을 감은 분이 있을지 모르니 굳이 설명을 하자면,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오대수가 괴한에 붙잡혀 감금됐을 때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이에요. 그 방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보면 계속해서 슬쩍슬쩍 카메라에 잡히는데 처음 그 방에서 찍은 장면에서 아주 크게 클로즈업이 돼요. 물감이 굉장히 두텁게 칠해져 있고 재질의 거친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로 카메라가 선명하게 이 그림을 확대해서 보여줘요. 미술 용어로 마티에르matière라고 해요. 표면의 질감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겠네요.
한기일 : 괴물처럼 보이는 남자의 얼굴 모습입니다. 얼굴에 패인 깊은 주름들 사이로 피가 흐릅니다. 더욱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얼굴 표정이에요. 입꼬리는 분명 올라가 있는데 웃는 것인지 분노한 것인지 표정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이혜정 :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배가 되는 것 같아요. 사실 그림 속 인물은 슬퍼하고 있어요. 작품의 제목이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이거든요.
한기일 : 피눈물을 흘릴 만큼 슬플 정도라면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했나 봅니다^^
이혜정 :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1860~1949년)라는 벨기에 화가가 1891년에 예수님을 그린 작품이에요.
한기일 : 아!
이혜정 : 영화를 자세히 보면 그림 전체를 한 화면에 다 담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어요. 그러면서도 얼굴 맨 윗부분은 보여주지 않고 눈 바로 아래에서 화면이 끝나요. 그런데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림 속 인물의 머리에 놓인 가시 면류관을 확인할 수 있어요.
한기일 : 얼굴 주름 사이로 흐른다고 봤던 피가 사실은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거군요.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 아래에 유명한 명대사가 쓰여 있잖아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그림에 원래 있는 것인가요?
이혜정 : 제임스 앙소르가 그린 원본에는 이런 문구가 없어요. 사실 원작 그림과 영화에 나온 그림은 많이 달라요. 일단 크기부터 상당히 차이가 있는데요. 원작은 크기가 세로 21.5센티미터, 가로 16센티미터로 작아요. 제가 잘라봤더니 A4 절반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영화 속 그림은 어림잡아도 그보다는 훨씬 커 보여요.
한기일 : 영화에 오대수가 이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대수의 얼굴도 작은 편이 아닌데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이 더 컸어요^^
이혜정 : 영화에서는 원작보다 그림을 최소 네 배 이상 키운 것 같아요. 그리고 원작은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에 그린 그림이에요. 보통 나무 패널에 그린 그림은 마티에르가 두텁게 표현되지 않아요. 앙소르의 원본 역시 마찬가지고요. 영화에서는 소품 팀이 캔버스에 물감을 굉장히 두텁게 칠해서 완성한 게 아닐까 싶어요. 자세히 보면 색도 조금 달라요. 영화 속 그림이 훨씬 진하죠.
한기일 : 크기나 색, 마티에르까지 원본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실제보다 훨씬 크고 강렬하게 맞춤 제작을 한 것이군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변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신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박찬욱 감독은 미술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에 가능하다 싶습니다.
이혜정 :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제임스 앙소르는 벨기에의 화폐 도안으로 그려지고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될 만큼 유명한 화가예요. 감히 이런 화가의 작품에 손을 댄다는 것은 박찬욱 감독이 그만큼 미술에 정통하다는 반증이 되겠죠. 여러모로 시각적 연출로는 아마 국내 최고인 것 같아요.
한기일 : 저는 제임스 앙소르라는 이름도 낯설고, 벨기에 작가라니 더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화가들은 온통 프랑스 사람일 것 같거든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혜정 : 미술사에서 프랑스의 위상은 영화사에서 미국쯤 될 거예요^^ 미술사에서 플랑드르 미술Flemish art은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지역의 미술을 일컫는데요. 17세기까지 반 에이크Van Eyck 형제(형 휴베르트Hubert․동생 얀Jan)․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같은 굵직굵직한 화가들이 배출되면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는 주류 프랑스 회화를 그저 추종하는 차원으로 전락하면서 주춤하다가 19세기 중엽 제임스 앙소르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존재를 알리게 되죠.
한기일 : 혜정 씨가 ‘굵직굵직한 화가들’이라고 나열한 이름 중에 제가 아는 화가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쨌든 벨기에가 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겠군요.
이혜정 : 핵심을 잘 짚으셨어요. 저는 왜 이토록 길게 설명했을까요^^ 앙소르는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친 화가로 평가돼요. 표현주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통적으로 미술이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면, 표현주의는 작가가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이나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사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기일 :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요?
이혜정 : 예를 들어보죠. 제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고 치고 기일 씨의 초상화를 주문 받아서 그리는 거예요. 저는 당대 최고의 화가일 테니까 기일 씨를 사진처럼 생생하게 아주 똑같이 그리겠죠^^
한기일 : 모델이 훌륭하니까요^^
이혜정 : 음, 일단은 넘어갈게요. 만약 제가 표현주의 화가라면 제 감정을 담아 기일 씨를 그릴 거예요. 그러면 기일 씨의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눈은 찢어지고 피부색도 슈렉처럼 초록색을 써서 그릴 수 있는 거죠^^
한기일 : 아니, 평소 저에 대한 감정이 어떻길래!
이혜정 : 마음에 확 와 닿는 예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예요.
한기일 : 덕분에 확실히 이해했습니다(독자님들께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설명을 듣고 나니 앙소르의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이혜정 : 「슬픔의 사람」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앙소르 말고 다른 화가들도 많이 그렸어요. ‘Man of Sorrows’라는 표현은 원래 성경 <이사야> 53장 3절에 나오는 말이에요.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a Man of Sorrows, and familiar with suffering.” 직역해보면 “슬픔의 사람,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거절당했으며 고통당하였다” 정도가 될 텐데요. 예수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13세기에 오면 피에타만큼이나 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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