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ted: The Seed Beyond The Wall
Intro. 은행의 독백
나는 앉아 있었다.
낯선 환경 속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앉아만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라면 곧 홀로 설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반드시 서야만 한다. 나를 지키며 도와준 이를 위해서라도, 엄마 아빠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혼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S#.1 소담리 마을, 언덕 위 해순 할멈의 초가집.
푹 말린 메주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부엌 아궁이에선 구수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저물어가는 하늘 위에 노릇한 구름이 누워 저녁을 알린다. 구부정한 허리에 뒷집을 지고 선 할멈은 곡소리를 하며 저녁 짓기에 열을 올린다. 헝클어진 해순의 머리가 분주함을 말한다.
해순: 아이고, 시강이 어째 이리됐단가. 얼릉 밥 해묵고 치워야겄다우.
콧잔등에 송골히 맺힌 땀방울이 무거워질 무렵 해순의 소박한 식사가 시작된다. 일찍부터 움직거린 것에 비해 보잘것없지만 맛은 있는지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흰쌀밥을 쩝쩝거리며 씹다 보니 구수한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요기를 하고 낡은 빗자루를 잡아든 해순은 바닥을 슥슥 쓸어본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 열매가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죄다 터지기 전에 얼른 걷어 쪄먹겠다 생각해 본다. 그러다 빗자루 끝자락에 걸린 딱딱한 열매 하나를 발견하곤, 손으로 집어 담장 너머로 툭 던진다.
해순: 저런 것은 쓸모짝에도 없당게 저짝으로 내다 버려불라우.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한 은행 열매가 담벼락을 넘어 버석한 흙바닥에 툭 떨어진다.
S#.2 담장 너머, 척박한 불모지
휘이익, 휘이익. 스산한 바람이 분다. 녹아내릴듯한 무더위를 건너 찾아온 가을. 한참이나 높고 파란 하늘은 배부른 계절이나 주위엔 풍족함이라곤 찾을 수 없다. 볼거리가 많은 담장 안 해순의 집에 비해 적막한 기운만 감도는 이곳. 화분에 앉은 어여쁜 꽃도 없고, 꼬리를 살랑이는 누렁이도 보이지 않는다. 노래하는 새들은커녕 흥을 절로 나게 하는 할멈의 콧노래마저도 없다.
은행: 아이 추워라. 간밤에 매한테 잡아 먹히면 어떡하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너무 무서운 걸.
선선한 가을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켜 눈을 따갑게 하고 물기 없이 메마른 땅 속은 차디 차다.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누워 좁은 틈 사이로 애먼 하늘만 바라본다. 혼자가 되었다. 꼭 붙잡고 있던 엄마 아빠의 손을 놓아 버렸다. 소쿠리에 담겨 비명을 지르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해 잠든 와중 깜짝 놀라 깨기를 반복한다. 애타게 불러도 목소리가 닿지 않는 이곳은 숨 죽은 땅 속.
폭폭한 이불처럼 따뜻한 흙이 없다. 수분을 머금어 촉촉한 감촉마저 느낄 수 없다. 바스러지는 흙더미 속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워진다.
S#.3 늦은 밤, 찬 바람이 깃드는 땅 속
날이 저물고 무거운 바람이 차갑게 나를 에워싼다. 벌어진 틈 사이를 파고드는 시퍼런 바람에 이가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낸다. 미세한 진동에 몸이 흔들려 몸을 더욱 웅크린다. 혼자가 되었다는 두려움에 자꾸만 눈물이 흐르고 공허한 밤하늘에 부엉이 소리만 우흥우흥 울려 퍼진다. 며칠 째 허기를 달래지 못해 점차 힘을 잃어만 간다. 손끝 발끝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희미해지며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그렇게 손을 호호 불다 서서히 잠에 들며 빛을 잃어간다.
은행: 춥고 배고파. 엄마 아빠도 너무 보고 싶어. 아무도 없는 걸까. 무서워 죽겠어. 밖으로 나가고 싶..ㅇ..
S#.4 이튿날 아침, 아침 소리에 잠을 깬 은행
오른쪽 볼의 따뜻함에 미소가 지어진다. 귀를 대고 있는 바닥마저 따스한 기운이 감돌아 움츠렸던 몸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한다. 좁은 틈 사이로 사락사락 빗소리가 들려온다. 버석하게 말라 찢어질듯한 목구멍으로 침을 꾹 삼키며 위에서 떨어지는 비에 입을 갖다 댄다. 짠기가 있지만 달콤하다. 고개를 돌려 구멍 속 하늘을 바라보니 맑은 하늘에 내리는 반가운 비다.
은행 : 이대로라면 기운을 차릴 수는 있겠어. 아 따스해. 더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지만 이 정도가 어디야. 이 정도도 충분해. 조금만 기운을 차려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도움을 구할 데가 반드시 있을 거야.
잃어가던 의식을 바로 잡고 목을 축이는 은행. 멈춰있던 숨결에 다시 힘이 생기며 눈빛이 돌아온다. 비 내리는 하늘의 따사로운 햇빛 한 줄기에 벅차오른다. 눈이 부시지만 포근한 빛에 절로 웃음이 난다. 바싹 돋아있던 닭살이 차차 수그러들며 온몸에 온기가 전해진다. 포근한 침대 위에서 긴 잠을 잔 것처럼 몸이 가볍다.
쪼그라 있던 손등이 서서히 펴지고 맥을 못 추던 다리에도 힘이 생긴다. 천천히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보다 더 나은 영양분이 필요하지만 잠들어있던 삶의 의욕이 다시 일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긴다. 천천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윗동네 아랫동네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자신감이 생긴다. 엄마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주셨던 방법이 있으니 그대로만 따라 한다면 별 문제없을 거라 생각한다.
S#.5 은행의 머릿속, 갓난아이 시절의 회상
눈을 굴려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 아빠가 재차 강조하던 은행의 성장 제1의 법칙을 떠올린다.
은행: 엄마 아빠가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했었지? 음.. 글쎄 뭐였지? 갈..ㄱ..ㅏㄹ.. 아! 밭을 갈아야 한다고 했다. 드디어 기억났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기 위해서는 골고루 갈린 비옥한 땅이 있어야 가능하댔어. 맞아.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를 떠올린다. 부드럽고 윤기 나는 흙이 있어야 은행이들이 쑥쑥 클 수 있다 했던 날을 회상한다. 하지만 바짝 굳어 말라버린 지 오래된 이 땅.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짤막한 팔다리를 움직여 주위를 열심히 갈아본다고 해도 한참 역부족이다. 얇은 입술을 앙다물며 곰곰이 생각하는 은행.
은행: 혼자서는 불가능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주위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움을 청해 봐야겠어.
(큼큼 기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저기, 옆에 누구 없어요? 제 얘기 들리시나요?
은행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으나 갈라진 땅에 부딪혀 다시 돌아온다.
은행: 혹시 아무도 없나요? 누군가 저를 도와주세요. 도움이 필요해요.
다시 용기를 내어 소리를 낸 은행.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돈다. 5분 즈음 시간이 지났을까,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크고 까만 그림자에 잠시 움찔이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갈색의 두더지다.
은행: 아.. 안녕하세요 두더지씨. 저는 은행나무 열매에서 떨어진 은행이에요. 저의 물음에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두: 안녕, 은행이. 나는 두두라고 한단다. 무엇이 필요하니?
은행: 제게는 두두 아저씨의 힘이 필요해요. 저를 위해 흙을 갈아주실 수 있나요?
두두: 흙을? 알다시피 이 땅은 관리한 지 오래되어 딱딱히 굳어있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은행: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아저씨. 하지만 저는 밖으로 나가야만 해요. 이곳이 너무 거칠고 단단해 팔다리를 자유로이 펼 수 없고, 더 멋진 나무로 자라날 수 없어요. 엄마 아빠의 유일한 꿈이었는데...
두두: 그렇구나.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니?
은행: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사실 저 담장 너머의 해순 할멈네서 이별하게 되었어요. 할멈이 큰 아궁이에 쪄서 먹을 거라 하며 소쿠리에 은행들을 한가득 담았는데, 저는 아직 딱딱한 껍질을 깨지 못해 이곳에 버려졌고, 엄마 아빠는.. 그곳에..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두두: 아이고 내가 괜한 말을 꺼내었구나.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자. 일단 이곳이 척박하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게야. 나 역시도 나 있던 통로로만 다녀 힘을 써 본 지 오래란다.
은행: 아저씨, 저를 꼭 도와주세요. 훗날 제가 기다란 나무로 자라난다면 꼭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두두: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 그렇담 힘 한번 써보도록 하마. 마침 간만에 동창들을 만나기로 했으니 도움을 같이 구해보마. 너무 기대는 말고,
은행: 정말요? 너무 감사해요 아저씨. 제가 꼭 아저씨의 은혜 잊지 않을게요.
두두: 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만 노력해 보마.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보렴.
은행: 이 정도면 충분한걸요? 감사해요 아저씨. 절대 오늘을 잊지 않을 거예요.
첫 문장 출처: 본 헌터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 고경태
"당신이 오늘 읽은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살포시 두고 가시면, 이어가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