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벌로 내게 글짓기를 시켰다.
손이 파르르 떨려 연필을 잡는 것조차 어렵다. 기력이 다함을 피부로 느낀다. 사실 글짓기가 싫은 것은 아니다. 흰 종이 위에 글자를 얹는 것이 예년보다 힘들어졌다는 것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플 뿐이다. 한 없이 무력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벌써 1년을 꼬박 채우고도 반년이 더 흘렀다.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다. 단지 발끝부터 다리까지 우레한 느낌이 간헐적으로 있었을 뿐이다. 머리를 콕콕 찌르는 두통도 좀 있었고. 증상을 느낀 지는 어언 3년째이나 미영이와 도준이에게 말을 꺼내진 않았다. 지들 밥 벌어먹고살기도 바쁜데 괜한 걱정거리를 얹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하루 왠종일 괴로운 것도 아니니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간간히 타이레놀 몇 알이면 진정되었으니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성 두통 뭐 그런 것쯤으로 생각하곤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하지만, 뭐든 무식하게 참으면 화를 불러온다 하였다. 풀리지 않도록 꼭꼭 싸두었던 비밀은 결국 들통나고야 말았다.
햇살 노인정의 문화모임 날이었다. 문화 모임이라는 명목 뒤엔 합법적으로 술판을 벌이는 잔치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제 새끼들로부터 금주령을 당한 노쇠한 노인네들이 1년에 두어 번 맘 껏 반주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그날만 다가오면 마을 전체가 취한 듯 붕 떠 있었다. 모두가 제 찻장에 고이 모셔둔 몇 년산 인삼주니 포도주니 온갖 술을 준비했고, 꼭 어울리는 맛깔나는 음식도 알아서 척척 준비해 왔다. 나 역시 이번에도 가장 자신 있는 새빨간 오징어 볶음과 냉장고에 수북이 쌓인 부추를 다듬어 파전거리를 준비했다.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에 눈을 뜨니, 창 밖으로 또록또록 빗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날은 단연코 파전이지, 하며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마침 파전에 어울리는 수제 막걸리까지 담가두어 안성맞춤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일 없는 평소에는 꼬장한 모습으로 동네를 나돌았지만 오늘 만큼은 분도 찍어 바르고, 진분홍 립스틱을 진하게 바를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가득 찬 냉장고가 어느새 홀쭉해졌다. 불룩해진 가방을 보고 있으니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지난주 미영이와 도준이가 보낸 시나노 골드 사과와 말린 곶감도 그 위에 얹었다. 만반의 준비도 다 했겠다, 나갈 채비만 하면 되었다. 화장실 거울로 딱딱히 굳은 눈곱을 비벼 떨어뜨렸다. 그리고 폭싹 눌린 머리카락을 슬쩍 당겨와 코에 갖다 댔다. 쿰쿰한 냄새로 갔다간 문화 모임을 제대로 못 즐길 터이니 샤워만은 꼭 해야겠다 생각했다. 화장실 바닥에 물기가 흥건한 건 질색이지만 이 정도는 감내해야 유쾌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옷을 뒤집어 벗으려는 그때,
쿵. 철푸덕.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형광등뿐이었다. 전구가 나갔구나.
애써 마음을 쓸어내리며 정신을 차리려는 그때 삐-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바늘로 쑤시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고, 아야.
눈살이 찌푸려졌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두 동강 나버릴 듯한 고통이었다. 어찌나 아팠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어 턱관절이 얼얼할 정도였다. 일어나지 못한 채 애먼 천장만 멀뚱 거리고 있는데 불현듯 이곳이 집이 아니라 병실임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손 쓸 수 없는 통증에 꽉 잡혀 발버둥 쳐보았지만 결국 제자리였다. 멍한 채로 누워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이었다.
"엄마 !!!!!!! 어떻게 된 일이에요 !!!!!"
"어... 미..영아... 나도 눈 감았다가 뜨니 지금 여기에 와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아니 도준이 전화받고 급하게 서울에서 내려왔어. 화장실에서 정신 잃고 쓰러져 있으셨대."
"내가? 내가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대..?"
"기억 안 나요 엄마? 진짜 잘못해서 머리로 넘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네."
"나는 씻으려다가 갑자기 앞이 캄캄해져서 불이 나간 줄 알았지. 근데 일어나 보니 여기에 있네.."
"진짜 내가 못살아. 도준이가 근처에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네."
"도준이는?"
"걔 지금 급히 입원 수속하고 있고, 의사 만나고 올 거예요."
"별일 아닐 거야. 넘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도준이 있으니까 바쁠 텐데 어여 서울 올라가 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엄만 진짜. 엄마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요."
"괜찮다, 괜찮어. 별일 아니야. 요즘 두통이 있었는데 신경을 좀 썼는지 무리해서 그런 거겠지 뭐. 걱정 마."
"왜, 뭐에 신경 썼길래. 뭐가 또 잘못된 건데, 뭔데. 빨리 말해봐요."
"이 다 늙은 노인네한테 뭐가 있겠어. 걱정할 일 아무것도 없다. 진짜로 없어."
"에효. 엄마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도준이 올 때까지 누워서 쉬고 있어요."
미영의 양 볼은 발개져 있었다. 고뿔에도 걸려본 적 없는 튼실한 노인네가 입원했다는 소식이 적잖이 그녀를 당황시켰다. 정신없이 누워있기 바쁜 와중에도, 혼비백산인 딸아이를 안심시키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그 잠깐 사이에 기절하여 잠이 든 탓인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간만의 숙면에 정신은 더 또렷했다. 이 정도면 별 탈 없겠다 생각하며 진정되어 가는 찰나 문 쪽으로 걸어오는 도준이 보였다.
반가움에 고개를 빼꼼하며 도준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표정 없이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지 누이와 10살 터울인 막내라 한참을 놀랐지 싶어 안쓰러워지려던 찰나 도준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며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내게 돌아온 것은 눈에 띄게 붉어지는 눈시울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꽉 붙잡고 있던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음을 직감하고야 말았다.
첫 문장 출처: 독일어 시간 / 지그프리트 렌츠
"당신이 오늘 읽은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살포시 두고 가시면, 이어가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