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지며 결심이 섰다.
7남매 중 여섯째, 이름은 '토'다. 우리 집 남매들 이름은 전부 외자다. 남들은 꼬박 세 자리를 채워 이름을 지었지만 나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손자들의 이름은 꼭 외자로 지어야 한다는 조부모의 뜻을 이기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이 저출산 시대에 5남매라는 것은 국가에 공헌하는 큰 일이라며 자타가 공인했지만, 나의 부모는 생각보다 더 열렬한 애국자였다. 아들과 딸 성비 균형은 맞춰야 한다며 나와 막내 동생을 또 한 번 세상에 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시끌벅적한 애국 칠 남매 가족이 되었다.
큰 누나 네 명과 작은 형은 사이가 참 좋았다. 어딜 가나 다닥다닥 붙어 다녔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좋아 보이는 사이로 들어가려 낑낑거려 봤지만 작은 틈조차 내주지 않았던 이들이다. 한 껏 재롱부리는 나를 귀여워했던 누나들과 형이었지만, 그 사이만큼은 철저히 막아내며 흐뭇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누나와 형 품 속에 안기고만 싶었던 어린 나는 그런 상황이 이해되지는 않았다.
머리털도 자라고, 키도 쑥쑥 커가던 나는 한 날 거실에서 엄마 아빠의 대화를 들었다. 듣자 하니 누나들과 형은 워ㅋ..ㅓ .. 뭐시기라 했다. 아, 워커 홀릭이라고 했다. 일을 참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단다. 숙제하려 연필을 드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누나들과 형은 회사에 빠지지도 않고 참 착실히도 일한다 했다. 그중 다섯 터울의 첫째 누나는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가 밤늦게 돌아오곤 했는데, 집 비밀번호를 띡띡 누르고 들어오면 보이는 누나의 얼굴에는 시퍼런 다크서클이 항상 드리워져 있었다. 반가움에 쪼르르 달려가 누나를 올려다보면 억지웃음을 뵈고선 그대로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이 없는 뒷모습을 볼 때가 더 많았던 큰 누나. 누나는 항상 지쳐 보였다. 엄마 아빠는 그런 누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집안을 일으킬 장녀라며 은근히 좋아했다. 온 기대를 몰아 받고 있던 누나의 어깨는 항상 무거운 짐이 올라간 듯 아래로만 축 쳐져가고 있었다.
그런 큰 누나와 막역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는 그 모습을 꼭 빼닮았다. 일하는 것이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마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나들과 형은 말수가 적어졌고, 반복되는 스트레스로 피폐해져만 갔다. 아는 것이 없던 어린 나이었지만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며 자라온 나는 '원하지 않는 일'은 '고통'이라 여기며 다 커서는 하고 싶은 일을 꼭 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5남매와는 달랐다. 푸근한 침대 위에서 온몸을 부비적거리는 일, 소파 위로 다이빙 해 한쪽 머리를 괴고 베스트셀러 읽는 것을 즐겼다. 삼시 세끼를 정갈하게 챙겨 먹는 것을 좋아했으며 로봇을 조립하고 움직이는 일을 사랑했다. 경쟁 사회에서는 바쁘고 치열한 노력만이 삶의 지반이 되어준다고들 했지만, 내 눈에 찬 그들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 셋째 누나와 작은 형이 방 안에서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터질듯한 오줌보에 눈도 다 못 뜨고 급히 화장실을 찾았는데,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푹푹 쉬며 작은형과 대화하고 있는 셋째 누나를 보았다.
"우리 다섯째, 목이 너는 요즘 어때?"
"누나 말도 말어. 내가 집에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힘들어 죽을 맛이야."
"너는 뭐가 힘든데."
"뭐라니. 그냥 먹고 사는 거 똑같지. 업무에는 맨날 치이고, 성격 거지 같은 팀 사수는 나를 자꾸만 괴롭히고. 그보다 가끔은 내가 뭐 하고 사는지 현타 올 때가 있다니까?"
"그런 줄은 몰랐네. 하도 말을 안 하니 원..."
"에이 뭐 하러 말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뭐.. 작은 누나는 어떤데?"
"사실.. 나도 퇴사할까 고민 중이야.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지금 하는 일 재미도 없고."
"그랬구나. 다들 표정 보아하니 죽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더구먼. 에효.
그래도 어쩌겠어. 엄마 아빠가 우리한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그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뭐.
하지만 우리가 이렇더라도 막내 토,일이는 우리를 닮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지는 요즘이야."
"나도 그래. 쟤들은 진짜 우리처럼 힘들지 않고 편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정말."
내가 느낀 그대로였다. 이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출퇴근에 지쳐있었고 그럴수록 말을 아꼈다. 한 때 누나들과 형은 공통 관심사가 있어 친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일말의 간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누이들은 내가 힘들지 않도록 꽉 막고 선 방패막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동생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애틋한 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바람대로 행복을 소중히, 그리고 지키며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적극적으로 쉬어가며 나만의 시간을 찾아 더 몰두하는 것에, 그리고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을 천천히 그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첫 문장 출처: 지구를 항해하는 초록배에 탑니다 / 김연식
"당신이 오늘 읽은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살포시 두고 가시면, 이어가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