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과하세요. 제가 푼 거 맞단 말이에요.

by 모티


찌든 담배 냄새와 믹스 커피를 달고 사는 권선생은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책상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듯한 짤막한 다리를 왼 허벅지에 얹어 슬리퍼를 달달 떨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비장하게 팔짱을 끼고서 해진에게 할 말을 어떻게 건네어야 할지 고민했다. 책상 위로 넓게 펼쳐둔 여러 장의 시험지를 몇 번이고 들춰보며 볼펜 뒤축을 딱딱 내리쳤다.


똑똑, 드르륵.

해진이 노크와 함께 조심스레 교무실로 들어섰다.


"선생님, 저 부르셨다고..." 교무실 부름은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죄 없는 사람도 경찰차만 옆으로 쓱 지나가면 바짝 긴장을 세우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잔뜩 긴장해 입안에 그나마 남아있던 침마저 마르기 시작했다.

"어, 어 그래. 해진이 왔구나. 점심은 먹었니?" 하려던 말을 곧장 하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며 해진의 안부를 물었다.

"아, 네 방금 먹고 왔어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엄숙하고 차분한 교무실 속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해진은 서둘러 용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아, 그래 본론부터 얘기하마. 오늘 오전에 치른 수학 시험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불렀어." 고심 끝에 권선생은 냉철한 어른으로서 해진을 가르치겠단 의도로 묵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수학 머리는 일절 없던 해진이었기에 이번 시험에서도 꼴찌를 전전하는 가소로운 성적에 참다못한 선생이 불렀다 생각했다. 해진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해진이 네가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은 영 뒤떨어졌었던 것 같은데."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역시나라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오늘 시험에서는 꽤 좋은 성적을 받았더구나. 알고 있니?" 시험지로 향해있던 권선생의 눈이 본론을 읊으려는 듯 해진을 향했다.

"제.. 제가요? 아직 가채점도 안 했는데요. 얼마나... 잘 나왔나요?" 예상보다 좋은 성적이라는 말에 해진의 눈은 점점 커지며 권선생을 쳐다보았다.

"87점이다."

"파..팔십 칠점이요?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책상 위의 여러 시험지들 중 빨간 숫자로 87이라 새겨진 곳을 눈으로 훑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87점. 평소 성적보다 무려 40점이나 넘는 점수야. 그래서 말인데..." 권선생의 두꺼운 쌍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네가 푼 것이 맞니?"

"네? 당연히 제가 풀었죠..." 권선생의 물음에 해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네가 충분히 노력했을 걸도 알지만 단번에 40점이나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앞자리에 앉은 지연이의 시험지가 보였던 것은 아닐지 물어보고 싶구나.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하면 용서하마. 숨기려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 제멋대로 내린 결론에 제대로 만족한 권선생은 너그러운 선생인양 말을 이어갔다.

"... 선생님. 제가 커닝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소리를 높여본 적 없는 해진이 저도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 해진아 여기서 크게 얘기해서 좋을 것도 없으니 소리를 좀 낮추거라. 다른 반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지나가다 듣기라도 하면 괜한 오해를 더 크게 살 수도 있으니. 선생님 말은 커닝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혹시 그랬다고 한다면 솔직히 말해달라는 말이야." 국어에 재능이 없어 수학을 전공한 권선생은 똑같은 말을 아 다르고 어 다르게 토해냈다.

"저 커닝 안 했어요. 지연이 시험지를 본 적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요. 제가 직접 풀어서 냈어요. 진짜예요." 인터넷에서만 떠돌 것 같은 이야기가 해진에게 들이닥쳤다. 몰아치는 감정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지만 결백함을 증명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던 해진은 흔들리는 동공을 붙잡고 힘을 주어 얘기했다.

"그, 그래. 그렇구나. 그간 노력을 했나 보네. 그러면 해진아, 오늘 오전에 본 수학 시험지를 다시 줄 테니 여기서 풀어볼 수 있겠니?" 해진의 말은 힘없이 흩어져 권선생에게 가 닿지 못했다. 자신이 도대체 왜 두 번씩이나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는 납득할 수 없었으나 죄 없는 해진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할 것만 같았다. 꼼짝없이 죄인이 되어버린 해진은 부들거리는 손을 꽉 쥐며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해진이 유일하게 숨통을 터 놓을 수 있는 체육시간, 반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피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해진은 시험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다. 세게 쥔 연필심은 부러질 듯 말 듯 아슬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굳게 잡은 중지 첫마디가 연필 모양으로 깊게 파였다.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시험지 위로 떨어졌다. 곳곳에 퍼지다 만 자국들이 남았지만 그 자국이 말라가는 동안에도 해진은 수학 문제에만 집중했다. 권선생은 말없이 조용히 문제를 풀고 있는 해진을 흘긋거렸다. 아닌척하며 해진의 시험지를 힐끔거리며 풀이 과정을 살폈다. 긴장 속에 치러진 시험은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해진은 마지막 문제를 풀어내며 답안지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책상에 연필을 툭 내려놓았다.

"다 풀었어요."

"어..어 벌써?" 권선생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아 해진의 시험지를 가져갔다.

"네. 아까 풀었던 문제라 기억이 나서 빨리 풀 수 있었어요."

"그래 한번 보자꾸나." 의심의 눈초리로 해진과 시험지를 번갈아 보며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했다. 권선생의 손은 자꾸만 원을 그렸다. 다시 본 시험지 위에는 앞자리가 9인 점수가 매겨졌다. 그제서야 제 언행이 머쓱했는지 니코틴이 낀 이를 드러내며 멋쩍게 웃었고 담배 연기가 모조리 밴 손으로 해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진이가 노력을 많이 했구나 이번에. 이렇게만 하면 좋은 성적으로 대학까지는 문제없겠구나.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가져와 물어보고 더 올려보자꾸나. 그... 시험을 두 번 보긴 했지만 복습했다 생각하고 이제 체육 수업 들으러 가 봐도 된다. 수고했다."

"네."

사과하세요. 제 말이 맞았잖아요. 어떻게 선생님이 학생을 의심할 수 있어요. 같은 말들로 권선생에게 강하게 항변하고 싶은 해진이었으나 어서 가보라는 너풀거리는 손짓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권선생에겐 미안함 따위는 없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모바일 고스톱 게임만 들입다 바라보는 그를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입만 꾹 닫고 있는 저 자신이 더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미옥은 잡채와 불고기, 파전과 치킨 너겟을 한가득 상 위에 올렸다. 해진의 최애 음식들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해진보다 해진의 성적이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마음을 저녁 상위에 차려 보였다.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며 가방을 내리는 해진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왔어? 오늘은 어땠니?"

미옥의 시선은 풀 죽은 해진의 얼굴보다 해진의 가방을 향해 있었다.

"별일 없었어요."

예상이나 했다는 듯 해진 역시 미옥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별 일이 왜 없어 없긴. 오늘 수학 시험이었잖아. 어땠냐구. 잘 봤어?"

해진이 바닥에 벗어던진 얇은 자켓을 주워 옷걸이에 걸으며 추궁했다.

"시험은 괜찮게 봤어요. 87점이래요."

해진은 침대에 털썩 누워 벽 쪽을 바라봤고 잠자코 미옥의 질문에 무미건조한 대답만 늘어놓았다.

"어머, 성적이 많이 올랐네 우리 해진이. 벌써 채점을 한 거야? 아직 점수가 나오려면 좀 걸릴 텐데?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이 따로 말씀해 주시던?"

해진은 방정맞게 어깨를 들썩거리는 미옥이 보기 싫었다. 양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흥분하는 미옥의 모습이 흡사 촌스러운 금자씨를 연상케 해 더더욱이나 거부감이 들었다.

"그냥 알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말해주셔서."

"그러니까 어떻게 알게 되었냐구. 말을 좀 해봐.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미옥은 해진이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인 것은 틀림없기에 미세한 표정 변화쯤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사사건건 으름장을 놓는 미옥에게 일일이 얘기하지 않는 해진이었지만 유독 속상함이 컸던 오늘의 일을 생각하면 미옥에게 자꾸만 털어놓고 싶어졌다. 하지만 해진이 말을 더하면 할수록 미옥의 눈썹과 미간은 계속해서 구겨만 졌다.


"뭐? 시험을 다시 본 건 알겠고. 그 주변에 선생님들은 다 너 보고 있었을 거 아냐. 뭐라 한 사람은 없었니? 친구들은 없었고?" 미옥에게서 기대했던 따스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해진의 마음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열려있던 문 마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네가 속상한 거 알겠고, 시험도 다시 본 거 억울한 것도 알겠어. 근데 그렇다고 그 넓은 교무실에서 크게 얘기하면 어떡하니. 사람들 들으면 더 오해할 텐데. 시험이야 네가 본거 확실하면 한번 더 빠르게 보고 자신 있게 나오면 되지. 뭘 또 그렇게 울면서 얘기를 하긴 얘기를 해. 소문이 이상하게라도 퍼질까 걱정이다 정말."


미옥은 탐탁지 않은 해진의 대응에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미옥의 한숨 소리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해진의 가슴으로 날아와 비수로 꽂혔다.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해진 속의 마음의 방은 점점 좁아지며 해진을 귀퉁이 쪽으로 자꾸만 몰아넣었다. 그곳에서 고개를 파묻고 웅크리고 있는 해진을 구해줄 열쇠 따위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고, 가끔 그 문 앞을 서성이며 기웃거렸던 몇몇 이들의 발자국 역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