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정부 대표가 파견 오셨으니 논의를 다시 해봅시다. 모하비 차관, 그 자료를 통해 익히 보이시겠지만 단기적인 악재에 온 은행들이 휘청이고 있다오. 부끄럽지만 은행 안쪽의 구성이 그리 성하지 않아 누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렇게 흔들리게 되는구려. 상황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자면 우리 은행들을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공격하고 있는 형국이요. 아부다비의 일이 지금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자금 경색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오. 파산의 도미노가 시작되는 거지."
"뿐만 아닙니다. 저희 이스트라 웨스트 뱅크의 경우엔 경영권 인수까지 각오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저희 은행이 가지고 있는 포트폴리오의 구성에 대한 변경을 가하기 시작할 테고 그 돈들이 어디로 흘러 들어갈지는 뻔히 아실 겁니다. 미시적인 관점이지만 중동 지역에 있는 돈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게 될 겁니다."
"서방 쪽은 여전히 우리의 돈이 자기네 돈일 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지불한 돈을 언제든 손에 닿는 곳에 놓으려고 하지요. 비난하려는 건 아니지만 국부 펀드와 같은 자생적인 움직임이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한 건 분명합니다. 국부 펀드에 의해 커진 기업들은 아랍 지역을 제외한 다른 증권 거래소에 상장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스탠스나 여러 가지를 놓고 보았을 때 어떤 장애가 있을지 눈으로 직접 안 봐도 선하니까요. 법으로 아예 막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장 규모가 정해진 우리 지역에서 아무리 몸집을 키워봤자 유가의 흐름에 다들 우르르 넘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방계의 스탠스가 바뀌었습니다. 머니마켓의 큰 손들이 그쪽에 투자된 우리의 돈을 이용해 다른 곳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우리 쪽에 쏟아붓고 거품을 키운 뒤 가져가는 형국으로 말이죠. 유럽 연합의 복잡한 채무 관계에서 입는 피해보다는, 작지만 커지는 우리의 시장에 그야말로 돈을 붓고 있죠.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방어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가는 건 막지만 들어오는 걸 막는 장치는 없잖습니까?"
"모하비 차관, 우린 은행가들이네. 돈의 규모에 겁을 집어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은 통제 불가능으로 접어들려고 하고 있다네. 돈의 흐름을 우리가 조정할 수 없는 방향. 작금의 현실을 이리저리 둘러본 결과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야."
상석의 은행장들 사이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하비는 심각하게 이 사실들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분명 오일 머니를 통해 외국에 풀어놓은 자금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단기 유동 자금에 비할바 없이 거대했다. 문제는 이 단기 유동 자금이 은행들을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었고 자금 준비율에 못 미치는 은행들은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부가 나선다는 신호를 주면 단기 자금은 더 빨리 빠져나가 위기의 간극을 더 키울 것이다. 골치가 아프지만 외국에서 온 돈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생각나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실 것 같군요."
"맞네. 모하비, 여기 있는 몇몇 친구들은 비록 나서지는 못해도 그걸 바라고 있는 실정이지."
"얼마 정도를 필요로 하시는 겁니까?"
"아부다비처럼 모든 걸 떠넘길 생각은 이제 없다네. 그것은 사업 측면에선 좋은 결정이었을지 몰라도 그 여파가 너무 크구먼. 더군다나 지금은 그런 신호만 줘도 지금 들어와 있는 유동 자금보다 더 큰 바람이 몰아칠지 몰라. 은행가들은 가끔 돈의 성격을 파악할 때가 있는데 지금 들어와 있는 돈은 규모와 시기, 그리고 활동량을 높고 보았을 때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기만 할 뿐인 돈이야. 우리의 시장에 편입할 생각도, 오래 머물 생각도 없지. 미안하지만 이 회의에 참여 중인 몇몇의 은행은 정부의 조치가 있더라도 쓰러질 거네. 모하비 차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나?"
"의장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의 부임 이래 출자제한법이 약화되거나 철폐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이 법안이 전혀 효력을 발휘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법안은 분명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 지금의 문제는 아까 지적한 대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네. 쿠웨이트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대표들의 은행주의 증시 가치는 거의 기계적인 사이클을 타고 있고 그 자금은 달러가 아닌 자국에 등록된 자회사가 자국의 통화로 공격 중이야. 더 파급력이 크지."
"아..."
"여기 있는 몇몇 대표들의 은행에서는 유동성 시장 상황에 기인해 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도 계시고 투자한 회사로부터 대출을 몽땅 상환하겠다는 요청 아닌 요청을 듣고 왔지. 사태를 꾸미려고 하는 게 아닐세. 은행 간 상호 출자가 금지된 중동 지방에서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지. 우리의 율법은 성스럽지만 이러한 위기 앞에서는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할 뿐이라네."
난감한 문제였지만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은행들의 지급 준비율과 예금 자금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급 보증 공표가 있으면 어느 정도 신호를 주면서도 파급력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자제한법에 가로막힌 외국 자본들이 국내 시장에서 뛰어놀고 그대로 가져가 버리면 안 되니 그 돈을 일시적으로 국내에 묶어둘 필요는 있었다. 타이밍 싸움인 만큼 조치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모하비는 몇 가지 조치를 단계적으로 머릿속에 그리며 눈앞의 자료를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저희가 손해를 봐야 할 타이밍인 것 같군요. 돌아가서 공식적인 조치들을 공표하겠습니다."
"모하비 차관, 좀 더 들어보세나. 단지 돈 꿔달라고 부른 건 아니니까..."
"네...?"
"단지 그것만이 아니란 말일세."
모하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속내를 마침내 드러내어 나올 회심의 미소를 기대했으나 노인의 표정은 지친 표정 그대로였다. 진실 다음에 진실을 다시 말한다... 뭔가 거래를 기대하며 이 모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던 모하비는 신중하게 다시 청자의 자세를 취하며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모하비 차관, 외부의 공격이야 이번뿐만이 아니었고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문제가 될 거야. 은행장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돈이 이미 화폐로써의 가치를 잃어버린 부분도 있기 때문에 대규모의 중앙 정부 지원이 있더라도 구멍날 것은 날 것이라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계기를 통해 우린 벽을 세울 생각이라네."
"벽...이라면 어떤 걸 구상하고 계신 겁니까? 행정안이나 법안은 외부 세력의 반발만 더 크게 만들 뿐이잖습니까?"
"맞네. 유럽에서 도입되는 광범위한 거래세를 우리 시장에 접목할 만큼 우리의 시장이 성숙한 건 아니지. 우리의 시장은 아직 돈이 뭉쳐 돌아다니는 중심처는 아니야. 돈이 잠시 머물다가 이득을 품고 떠나는 곳이지. 게다가 유가의 영향도 많이 받으니 종잡기도 힘들고. 모하비 차관 자네가 추진했던 국부 펀드도 아직 펀드 마켓에선 중소 펀드 규모일 뿐이지.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정유 관련 산업 외에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산업 분야가 있는가?"
"... 그 부분에선 여기 계신 분들의 의지가 필요했지만..."
"그래, 그렇지. 우리가 놓쳤지. 그땐 눈이 가려져 있었지.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 있었는데 자네의 말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었네."
"의장님, 국부 펀드는 목표치는 아니지만 굴러가고는 있습니다. 마레크 은행과 3개 은행에서 다행히 표류되려는 이 펀드의 운용을 맡아 주었고... 지금 그게 갑자기 필요하신 건 아닐 텐데요. 쓸 수도 없고, 더 늘리기엔 시기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약간 답답한 마음에 모하비는 의중을 꺼내기 위한 강도를 높였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피곤한 표정을 애써 지우려하지도 않고 모하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하비는 마침내 그가 찾던 점을 보게 되었다. 노인의 눈빛에 이채로움이 담겨 표정과는 달리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올 말은 마음이 담긴 진실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공허한 진실이 아닌...
"그래, 벽을 세우는 계획. 모하비 차관, 우린 이제야 장부가 아닌 현실을 보게 되었네. 끊임없는 싸움에 지쳤고 끊임없이 돌고 도는 흐름이 지겨워졌지. 자네가 오기 전, 아니 우린 우리에게 위기가 오기 전부터 논의를 거듭했다네. 벽에 대한 최초의 제안은 자네의 친구이기도 한 하비브 대표가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지. 국부 펀드의 운용자이기도 한 그 모습다운 제안이었어. 모하비 차관, 우린 자네에게 에코 프로젝트에 관련된 제안을 하고자 하네."
체스의 턴이 돌아왔다. 하비브, 끝끝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숨기고 있었나... 노인의 이채로운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니 빈틈을 보일 수는 없었다. 침착함을 가장하기 위해 모하비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긴 척을 하였다. 기실 다음에 던진 말은 이미 노인이나 자신이나 정해져 있었다.
"에코 프로젝트는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계획에 변경이 가해질 타이밍은 아닙니다..."
"알고 있다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그다음을 보고 있지. 모하비 차관, 그 사막에 물을 채우고 정원을 가꾼 뒤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시는 바가 아닐 텐데요. 연안에 있는 도시 구역을 확장하여 새로 생성된 녹지 지역과 연결시킬 계획입니다. 녹지 구역엔 담수 시설을 활용한 산업 단지를 구축할 예정이고요. 생필품들을 공급해 줄 2차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5년 내엔 독자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할 복합 단지로 발전시킬 예정입니다."
모하비는 말을 하면서도 의아했다. 은행가로써, 그리고 행정가로서 워낙 유명했던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런 기초적인 질문만 던지고 있는 걸까?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가... 딴생각에 잠겨 있던 모하비는 그래서 그다음에 노인이 던진 말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모하비 차관. 그 땅은 누가 지킬 건가?"
"네?"
"그 땅과 땅 위에 배치될 자산들은 누가 지킬 거냐는 걸 묻는 걸세."
노인의 질문은 개인적인 궁금증과 위태로운 호기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 모하비는 그 질문에 불쾌함을 느끼며 질책을 했어야 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고 반문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 질문 또한 에코 프로젝트의 범주 안에 있었고 중앙아프리카를 위시한 4개의 시공 구역과 운송로를 보호하기 위한 아프리카 연합 방위군 창설 계획이 준비되었지만 이때의 모하비는 반쯤은 궁금함에 의지하고 반쯤은 멍청함에 이끌려 노인의 문답에 빠져들어 갔다. 흔히 협상 자리에서는 선두를 놓치면 끌려가게 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