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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창환 Nov 14. 2019

21.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티 (3)

'국가는 국민에게 귀의한다.'


서쪽의 아이들이 자국에서 뜻을 펼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전통적인 자국의 문화와 상충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모하비 또한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로써의 권력 구조를 분산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각 가문들이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힘의 근원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이기도 했다. 내무부에서 산업부로 옮겨간 뒤에야 모하비는 자신이 추진했던 일들이 왜 반대되고 실행되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국가가 국민을 키우고 돕는 구조가 아니라 지배하고 있는 구조로 자리 잡혀 있는 상태에서 과연 무엇이 권력을 행사하게 만들까...?


과거에는 종교와 칼이었으며 현재는 돈이 도구였다. 있는 돈을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추진했던 내무부의 일은 그래서 반대되었던 것이었고 돈으로 돈을 창출하는 방식인 산업부에서는 행동의 제약이 그리 크지 않았다. 모하비는 권력 구조를 분산시키고 나아가 사람들을 도우려면 그 창구가 되어줄 곳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래서 그가 추진한 일은 산업 단지의 조성이었다. 서방 세계에 빼앗긴, 필수로 우리가 스스로 마련해야 할 물품들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는 그렇게 바닥을 다지기로 했다.


"늦지 않게 왔구먼. 어서 오게..."

"하루에 두 번 만나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얻으라... 란 말을 할 거는 아니겠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마중 나온 하비브를 보며 모하비는 독설로 응대했다. 은행 연합회는 단순히 은행들 간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단체가  아니었다. 이 은행들은 중동 각지에서 운용 중인 30개 은행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며 서방 세계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곳이었다. 모하비가 이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파이낸싱 펀드를 통해 추진한 건설 사업이 중단되어 악성 채무로 변질되자 그것을 그대로 나라에 팔아 세금으로 자신들의 손실을 채워 버린 일 때문이었다. 건물 하나였다면 상관없지만 단위가 도시, 그것도 아부다비 자체라면  달라진다. 아부다비의 유리성들은 속이 빈 강정 같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빚만 쌓인 채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 일이 전 세계가 금융 거품이 꺼지며 자산을 잠식당하던 공포의 시절에 벌어졌었으나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아랍권엔 지배층의 부정을 널리 알릴 언론의 힘이 약했다. 하지만... 그 일의 책임이나 기분을 하비브에게 전달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은행의 일원이라고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그 양반들은 다 왔나?"

"회의는 이제 막 시작했을 거야. 난 자네 마중 나와서 데려가려고 했지."

"친절하시군. 친절해..."

"이봐, 마음 풀어. 그냥 얘기만 듣고 나중에 생각난 걸 얘기해 주면 돼."

"대책 같은 건 안 생각했다네. 어차피 나도 들으러 온 거니까. 혼자 설렁설렁 왔지만 어디까지나 내 공식 일정이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에코 프로젝트의 중립성을 지킬 방법을 오기 직전까지 계속 고민했었다. 5단계에 걸쳐 향후 30년간  지속될 이 프로젝트는 희한하게도 자금, 예산은 마르지 않았고 충분했다. 지금 꼬이고 있는 건 일할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유럽 쪽 인력을 활용해 빈자리를 채우려 했으나 유럽 연합의 기막힌 뉴스가 터져 이마저도 힘들게 되었다. 유럽 쪽으로의 귀향을 꿈꾸던 사람들의 근원적인 심리까지 바꿀 방법은 없었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건 그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뉴스였다. 정책마저 그 역할을 못 하는 지금 은행 연합회가 그런 뉴스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거라는 짐작은 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채널을 통해 소식을 접해두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대충 브리핑 좀 해주지. 뭘 원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흠, 그게 좋겠군. 밤 사이 고민 좀 해봤나? 은행 연합회가 갑자기 왜 나서는지에 대해 분명 이유를 궁금해하겠지. 맞아. 에코 프로젝트에 지금까지 보이던 은행들의 입장은 잘 알고 있다시피 관망이었네. 워낙 다양하게 얽혀있는 이해 구조와 추진 방식이 은행들로 하여금 주눅 들게 만들었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사실 은행들이 지금에야 나서는 건 자네, 모하비의 역할이 컸다네. 원체 빈틈도 없이 일을 추진한다고 불만들이 자자했었지..."

"그게 내 역할이었으니까. 국가 간 협약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 중인 일인데 외부의 입김이 닿으면 안 되지..."

"그래, 맞아. 친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업은 이미 사업이라는 말로 하기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커졌네. 3단계 공정까지 걸리는 기간이 무려 35년인데 기업이나 은행에서 누가 나서려고 하겠는가?"

"... 하지만 지금 나타났지 않은가? 한 명도 아니고 전부가 한 날, 한 자리에."


모하비의 독설이 끊이지 않자 하비브의 표정이 난처함에 가득했다. 뭐지...? 모하비는 의아했다. 하비브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의 여유를 지난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친구, 고백하건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무엇을 부탁하고 거드름을 피우기 위해 모인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의 절박함과 요청을 간곡히 읊조리기 위한 자리라고. 어젯밤까지 자네는 돈을 주물럭 거리는 은행가들이 모여 작당을 피우려고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야. 그건..."


연기나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는 사이니 하비브의 요청은 진실에 가까운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간밤에 생각했던, 그리고 유추했었던 시나리오는 머릿속에서 걷어 치우고 친구의 말을 경청해 보기로 했다. 하비브는 그러한 모하비의 태도 변화를 읽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친구. 복잡하지 않고 짧게 얘기해 주겠네. 은행장들이 모인 이유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다급함 때문이야. 자네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은행들이 돈이 없다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돈을 날렸지..."

"PF 프로젝트, 아부다비..."

"그것 때문에  8개 은행이 사라져 버리긴 했지. 근데 그것뿐만이 아니야. 은행들은 전방위로 공격당하고 있네. 진출할 법한 사업들에서부터, 돈 많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머니마켓에서... 나야 몸집을 작게 하는 대신 우리의 자리를 다져놓아 한숨을 돌렸지만 다른 곳은 아닐세. 은행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돈을 가지고 벌이는 전쟁이야. 그리고 우린 계속 지고 있다네. 돈은 하루, 1시간, 1분 단위로 흐르고 있지만 그 줄기가 점점 마르고 있는 형국이지."

"표정들은 엄숙한데 물 밑에선 발길질이 요란했구먼..."

"어쩔 수 없었지. 틈이 보이면 그 틈을 계속 공격당하니까. 공격의 주체는 헤지펀드를 위시한 서방계 그룹이야. 언제나 공격은 있었지만 지금은 규모와 연속성에서 다른 시기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지. 내가 확신 하나 할까? 자네가 은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한 분기가 지나면 그 싫어하는 은행의 반이 없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다시 한 분기가 지나면 그 반, 또 절반. 은행의 전체적인 규모가 작아질수록 파산의 속도도 빨라지겠지."

"은행들의 파산을 이용하려고 서방계가 움직인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자네의 이야기를 들으니."

"멀리  나가고 싶지 않지만 은행 다음은 어디겠나? 전체 은행을 망하게 하지 못할 정부의 지원이 이어지면 그 돈들도 잡아 먹히게 될 걸. 국유화 선언이라도 할 건가? 그럼 이제 국가적인 압력이 쏟아질 테지. 모하비, 우린 지고 있다네. 그리고 지면서 동시에 사라져 버리고 있고. 에코 프로젝트에 대한 사항도 이번 회의의 주제이긴 하지만 그 보다는 우리들의 생존 자체를 위한 하소연을 하기 위해  모이는 거라네."


사실 조짐은 눈치채고 있었다. 오일 머니를 거둬들인 거대 정유사들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전 세계 머니마켓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각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퍼져 있던 돈이 갑자기 중동 지역에 몰리기 시작한 건 불과 5일 전이었다. 경제통은 아니었던지라 모하비는 돈의 흐름 내역에 은행들만큼 민감하지는 않았다. 엉뚱하게도 위기감을 접할 수 있었던 건 경제 각 부처 정례 회의에서 친구이기도 했던 내무부 차관이 울상으로 국내의 현금 흐름이 경색되어 간다고 발표를 했을 때였다. 그 발표 직후에 벌어진 내무부와 경제부 간의 공방은 결국 국무총리가 나서 진정시켰을 때에야 멈췄다. 그때만 하더라도 모하비는 현금 경색의 원인이 계절적 요인에 기인하는 시차라고 가볍게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돈을 굴리는 은행장들의 모임에 오고 나서야 그 위기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왜 그들이..."

"가서 들어 보게. 직접 들어 보세나. 나는 오늘 자네를 초청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야. 어려운 자들은 따로 있으니 들어 보고 난 뒤에 다시 얘기해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하비브는 입을 다물었고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고 회의실에 이르러 무겁게 닫혀 있는 문을 열자 수많은 뜻을 품고 있는 눈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모하비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의 위기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고자 했지만 별 소득 없이 무겁게 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침중함을 숨기지 못한 회의는 모하비와 하비브가 자기 자리에 앉을 동안 잠시 중단되었고 말이 떠돌던 빈 공간엔 대신 담배 연기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모하비는 상석에 앉은 늙고 비대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줄여 알리 압둘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는 아랍 지역 은행 연합회의 대표였으며 그 자리에 걸맞게 4대째 이어져 온 은행 집안의 장남으로 아랍 지역에서 2번째 규모로 성장한 뱅크 오브 카타르의 지주였다. 양복보다는 전통 의상을 즐겨 입고 은행 장부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지금과 같은 외부 일에서 활약하기 좋아하는 그의 심성은 단점이자 장점이어서 지역색과 자존심이 가득한 아랍 지역 은행들을 한 자리에 묶어낸 일은 그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다소 짙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오. 어리석긴 하지만 지금은 이 한 줌의 담배가 정말 큰 위안이 된다오."


노인 알리는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모하비에게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모하비는 가볍게 목례를 건넸고 알리는 손짓으로 손님에게 대접할  물과 자료를 준비하게 했다. 깔끔한 양식으로 정리된 자료집 속엔 최근 1주일간 쿠웨이트와 주변 지역의 머니 마켓에서 벌어진 금융 전쟁의 흔적들이 스냅숏 형태로 찍혀 있었다. 지표만을 보고도 은행 측이 초반의 상승 랠리에 편입하였다가 20% 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이 손해만이라면 위기니 뭐니 하면서 모일 이유가 없겠지만 아부다비의 PF 프로젝트 이후 생긴 중동 은행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높은 채무 비율에 단기적이지만 급격한 자금 사정 변동은 몇십억 원에도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은행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문제로 작용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위기의 은행장들은 돈을 어디선가 가져와야만 했다. 익히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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