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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창환 Apr 06. 2018

0. 서장

한스 마이어와의 인터뷰

[ 이 인터뷰는 2019년 4월 글로벌 프로브 사의 에릭 포츠먼이 취재한 기사의 녹취본이다. ]

- 기자 : 반갑습니다. 에릭 포츠먼입니다.


- 한스 마이어 : 먼 길을 오셨군요. 오슬로가 처음이신가요?


- 기자 : 네, 지도가 없었으면 이 레스토랑 찾아오기도 힘들었을 것 같네요. 녹취를 해도 괜찮을까요?


- 한스 마이어 : 네, 이젠 저를 제재할 친구들도 없어졌는데요. 상관없습니다.


- 기자 : 감사합니다. 한스 씨,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귀하는 유럽 연합 해체 이전에 연합 정부 소속 정무 의원으로서 약 5년간 활동하셨는데 해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처음 들으신 적이 언제인가요?


- 한스 마이어 : 그 말 같잖은 안건을 처음 이 귀로 들었던 건 낚싯대에 물고기가 막 걸리려던 참이었죠. 발틱해 클러스터 회의를 마무리하고 3년 만에 겨우 얻은 휴가였는데. 이럴 때엔 정무 수석관이란 내 직함이 참 빌어먹게 느껴질 뿐 이랍니다. 생방송 중계를 듣고 난 뒤 정확히 5분 만에 내 전화기가 울리더군요. 그때 생각이 들었죠. 이거 또 오래가겠구나 라고.


- 기자 : 생중계로 처음 들으셨다고요?


- 한스 마이어 : 네, 그것도 좀 우습죠. 라디오로 듣고 있는 상황에서도 감이 잘 안 잡혔습니다. 지방 방송국에서 송출한 뉴스여서 그런지 몰라도 일간 기사처럼 반토막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달려갔죠. 브뤼셀로.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가니 지배인이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더군요. 양복쟁이들. 의례적인 말을 나누고 차를 타니 개인 제트기가 있는 지방 공항 활주로까지 호송해 주더라고요. 아무도 없는 비행기 안에 있으니 상황이 무슨 핵전쟁이라도 벌어진 것 같이 심각하게 굴어 실소가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나 그 실소는 의정용 브리핑 케이스에 담긴 문서를 넘기면서 금방 사라졌습니다.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어요. 이 안건이 유럽 연합을 끝장낼 거라는...


- 기자 : 그 안건의 내용을 좀 더 알 수 있을까요?


- 한스 마이어 : 안건은... 단어에서 전쟁 자만 빼놓은 것 같았죠. 허... 히틀러가 썼던 선전 포고문이 오히려 신사적이라 생각합니다. 아니지, 이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였어요. 베를린에서, 도버 해협에서, 영국에서 그런 역사가 있었죠. 세 번 다 모두 전쟁을 야기했거나 전투를 불타 오르게 했어요. 유럽 연합의 가치는 공동 정부로써 이미 공표되고 실현되었지요. 비록 유로존 붕괴와 같은 어두운 때와 독립국가연합과의 대립이 오욕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미 60여 년을 굴러온 '시스템'이었어요. 제길, 그걸 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 기자: 매우 나이브한 의견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한스 마이어 : 날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는 평가에도 동조합니다. 적어도 그렇다는 이야기이죠. 지금과 비교해 보면 내가 그런 꿈을 계속 갖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겠소? 우린 우리의 가치가 있었으며 하나의 유럽은 우릴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과 안전을 위해 존재했었잖아요? 지금과 비교해 보면 기자 당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린 잃어버렸어요. 유럽 연합의 우산 속에서 키우던 우리의 가치와 안전을 잃어버리고 우린 갈라졌지 않습니까? 국경 봉쇄안에 최초 서명했던 그 작자들이 가장 먼저 암살 리스트에 오르고 가장 먼저 그 나라들이 망가져 버린 건 결국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무시하고 우리의 전통을 외면했던 바로 그 결정 때문이라고 난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협정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의회로 복귀하고 어떤 조치를 취하셨나요?


- 한스 마이어 : 정보 파악이었죠. 몇 백장짜리 협정문 복사본만 읽은 상태에서 혼란에 빠진 체 무슨 일을 할까요? 오자마자 전화를 걸어 의회 외교 라인에 있던 친구들을 불러들였죠. 그 친구들은 그나마 나와 달라서 이 사태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알고 있긴 했으나... 얼굴은 말이 아니더군요. 아무튼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왜 이게 지금 튀어나온 거냐, 누가 시작한 거냐 등등... 페리스라는 친구를 통해 이 협정문이 맨 처음 이스탄불에서 진행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분들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었죠. 최초 협정안은 범죄인 인도 조약과 유사한 점이 많았지만 인터폴의 공조 방식과는 달랐고 그 예의 특별조항들이 달라붙어 있어 각 국의 사법권에 우선하려는 경향을 보였죠.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국가 기관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도록 했고 그 책임은 각 국에게 분산시키는 이상한 협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때는 우리가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사태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각 국의 생각이 담겨 있었을 겁니다. 이 협정문은 완성 상태였고 안건 상정 후 처리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린 이걸 볼 수 없었죠. 웸블리가 터졌으니까...


- 기자 : 웸블리 테러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 사건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요?


- 한스 마이어 : 컸죠. 아니, 컸었죠. 그 당시로 보았을 때... 웸블리와 9.11 테러를 비교하는 사람도 간혹 있어요. 역사의 간극이 10년 이상이나 벌어져 있는데도 모양새는 서로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곤 하죠. 지금이야 시간이 지났으니 그런 말들이 용서받을 수 있지만 나 조차도 그런 일률적인 비교가 가당키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포츠먼 양도 웸블리를 취재하셨을 테니 동조하시겠죠? 그런 미화는 현재에도 그리 어울리는 게 아니란 걸. 아무튼 웸블리... 뉴욕에서도 그 사건 이래로 나라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웸블리는 더 파급력이 컸죠. 단일 테러 사건 이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단 하나의 지표에서 시작해 유럽 연합 전체를 바꿔 버렸으니까. 4월 14일, 축구에 열광했던 5만 5천 명의 사람들이 48시간에 걸쳐 희생되었습니다. 우린 과거의 유물에서 자유롭지도 못했고 그것을 제대로 치우지도 못했어요. 악마의 도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방치했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폐에 물이 들어차 몸 안에서부터 익사해 가는 동안 그저 그 사람들을 지켜봐야만 했어요. 너무 크게 성공한 테러였죠. 설사 그러한 목표를 삼고 자행했다 하더라도 스스로도 놀랐을 겁니다. 스스로도 경악했겠죠. 히틀러도 하지 못한 일을 역사 속에, 현실 속에, 두 눈으로 목도하게 했으니... 그건... 9.11 테러와 같은 다음 단계로의 이행도 불가능하게 했죠. 남은 사람들을 파탄에 몰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라의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우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테러를 보게 된 것입니다. 과거 수많은 테러 조직들이 목표로 했던 그 테러의 목적. 국가를 마비시킨다... 웸블리는 그것의 의미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영국은 현재에 이른 이 시점에서도 분리를 선언한 지방 정부와 통합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4개국으로 통칭되던 지역 구분은 더더욱 심해졌죠. 역사 이래로 가장 심하게 분화된 상태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죠. 5만여 명 중 약 2만 명이 프랑스 국민 희생자들이었으니까. 그 사건 이후로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프랑스 사람들이 영국과 함께 이 협정안에 가장 열성을 기울였습니다. 2차 대전에서도, 그리고 웸블리도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야 했던 프랑스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들 스스로가 이성을 잃고 군국주의 경향으로 흘러간 걸 안타까워할 뿐이죠. 지금은 우리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 위상이 뒤바뀌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무서워하고 경계하고 있죠. 무기력과 국가 해체를 겪는 중인 영국을 대신해 프랑스가 그 몫까지 분노하고 심판하려는 걸 조심조심 덜어내고 있죠. 그들은 핵도 주저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그런 자세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요.


- 기자 : 웸블리 사건 이래로 프랑스와 영국 등의 상임 이사국은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 한스 마이어 : 2개로 갈라졌죠. 매파, 비둘기파. 너무 식상한 표현인가요? 하지만 공식석상이나 비공식 석상에서의 모습들을 제가 표현할 말은 그게 가장 적절한 것 같군요. 그 당시의 유럽 연합에서는 범죄자 인도 조약 같은 이 국경 봉쇄안의 초안보다는 다른 쪽에 더 신경을 기울였죠. 우선 나토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ISAF의 규모와 조직으로 유럽 연합군을 통합시켰고 재정 비율을 늘렸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중동 국가와의 마찰을 무릅쓰면서도 9.11 이후의 미국처럼 반 테러 목적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애국자법과 같은 초법적인 조치도 일부 이루어졌으며 과거의 교훈을 묻어 두고 국가 권력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미국과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죠.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들이 계획되는 동안 의회는 나토를 통해 누구를 상대하게 될지를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파악이야말로 늦은, 정말로 늦은 행동이었지요.


- 기자 : 나토와 독일 정보부가 합동으로 펼친 '쉬버린' 작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한스 마이어 : 쉬버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럽판 애국자 법인 베르그스텐 협약 이후엔 그러한 특수 작전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죠. 나토는 냉전을 다시 만난 것처럼 무한대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2차 대전과 코소보 이래로 미국이 이처럼 유럽에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시기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 손아귀에 있는 나토의 도움을 공식적으로는 거부했지만 활동량만 놓고 본다면 어느 나라보다 왕성하고 필요 이상의 국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쉬버린은 그 작전이 대중들에게 노출된 정보활동의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거론할 수 없는 더 큰 규모의 정보활동이 중첩되어 한 나라에서 제각각 벌어졌습니다. 유로존의 붕괴로 각 국의 화폐 단위가 다시 부활함에 따라 활동 규모를 짐작케 할 공통 지표조차 사라진 상태였죠. 약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유럽 연합 기간의 연간 경제 규모에 3배로 추산되는 돈이 이러한 정보활동과 군사 부문으로 삼켜졌습니다. 난 그 모든 일들을 종이와 친구들의 말로 듣게 되었죠.


- 기자 : 베르그스텐 협약이 유럽 연합의 해체를 가속화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한스 마이어 : 협약 당시 난 정무 수석의 비서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베르그스텐 협약의 이행 이후를 위해 독일에서의 후속 조치를 보고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협약 내용은 의회 내에 상임 이사국과 이사국 대표들로 이루어진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협약에 의해 발생할 각종 현안들을 처리하며 준군사, 군사적인 직접 조치가 필요할 경우 나토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골자였습니다. 정보 공동체 같은 정보기관의 통로 설치도 논의되었으나 이 부분에선 각 국의 이해관계가 어긋나 합의를 보진 못했죠. 이때 합의를 못 봐서 이후 쉬버린이 나타나게 된 겁니다. 협약 이후 행동에 나선 나토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감시 활동에 나섰죠. 나토가 동유럽 너머에서, 그리고 유럽 본토는 각 국이 활동하면서 웸블리 사건의 주력 용의자 및 테러에 관계된 조직들을 추격했지요. 협약은 그러한 행동들이 법의 보호와 효율성을 증대시켜 주는 데엔 효과적이었을 거라 판단합니다. 협약 자체는 미국의 애국자법과는 달리 권력의 나쁜 유혹들을 잘 이겨내며 이행되었어요. 하지만 사건과 배후 세력이 결국 문제가 되었죠. 너무 컸던 거지요.


- 기자 : 컸다고요?


- 한스 마이어 :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미국은 그때 90일간의 군사 작전과 270일간의 안정화 계획으로 전쟁에 돌입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아프간에서 발을 빼기까지 10여 년이 걸렸죠. 중세 시대를 빼놓고 근대사에서 가장 긴 전투 기록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게 된 현실도 이와 같았죠. 모두 우리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발 밑에 깔려 있었죠. 냉전 이래로 적을 잃어버린 유럽은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어요. 테러와의 전쟁에서 참견만 했을 뿐 적들이 우리를 겨누고 우리의 땅으로 넘어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토가 감시하던 동유럽 너머 국가는 이미 국가 붕괴 상태였습니다. 정부가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붕괴 국가 상태에 놓여 있었죠. 한순간에 진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베르그스텐 조약으로 날뛰던 정보기관들이 금방 과부하 상태와 능력 부족에 빠졌죠.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테러 세포 조직이 도처에 있음을 알게 되었죠. 통제와 조정을 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기에 각 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고려하여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쉬버린의 비극은 그때 야기된 겁니다. 과도한 권력, 통제되지 않는 정보, 비밀 작전들... 독일 정보부 현장 요원 100여 명과 이탈리아 정보부 고위 요원들, 그리고 미국 CIA 요원들. 그들이 2주일에 걸쳐 순차적으로 오인 공격과 폭탄 테러에 희생되었습니다. 테러를 자행하는 적들은 웸블리 이후 이미 공격 개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어요. 유럽 곳곳이 점점 폭탄의 향연장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런데 사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악화되었죠. 비로소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우린 그들을 격퇴할 전투 공간도, 안전 지역도 확보하지 못한 채 싸워야 했습니다.


- 기자 : 알겠습니다. 협약 이후의 상황에 대해 잘 밝혀지지 않는 사항들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짚고 가고 싶은데요. 테러 조직이 이처럼 방대해지고 또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 한스 마이어 : 나토와 CIA, 그리고 각 정보기관들... 협약의 도움이 있었지만 시간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핑계를 대고 싶군요. 웸블리를 하나의 테러 사건으로 접근하지 말고 적들의 전쟁 계획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작전으로 돌입했어야 했습니다. 난 선군 주의자는 아니지만 협약 이후의 접근을 돌이켜 보면 우리의 자세가 너무 안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라크와 알 카에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 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비국가 조직을 그렇게 힘겹게 물리치고도 우린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했어요. 여전히 그들이 존재하고 또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교훈을 돌이켜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와 비국가 조직 간의 대립을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지식과 지혜, 깨달은 점들은 너무나 적었죠. 전쟁의 변화에 인류 역사상 지속해 왔던 가장 큰 공동체인 국가 조직이 대처하지 못한 것이죠. 국가라는 울타리는 우릴 보호해 주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벽으로도 작용할 수 있음을 이제 우린 알게 된 거죠. 유럽 연합은 안에서부터 무너진 겁니다. 국경 봉쇄안을 통해 국가 조직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지만,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 우릴 완벽하게 보호해 주었지만... 이번엔 틀린 거죠. 실패한 겁니다. 테러 조직, 이젠 '연합(the Axis)'이라 불리는 공동체는 봉쇄된 국경 너머에서 유럽 본토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발 밑에서 우리를 끌어내리고 있지요. 우리 유럽인들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결코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유럽 각 국에서 국가와 비국가 조직인 연합의 균형비가 불완전한 화음을 내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콜롬비아의 FARC 가 보여 주었듯이 비국가 조직은 국경 없는 공동체로서 하나로 연결되고 있어요. 차츰차츰 말이죠. 그들에겐 과거 소련과 같은 존재로써 우릴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가가 그들에겐 소련이며 적인 셈이죠. 나의 생각이 과대망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 이미 나토 총사령관으로 있는 나의 친구, 존 윌터레프트마저 이 의견에 동의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고민 중입니다. 유럽 연합도 무너지고 각 국이 아프간과 같은 각개전투를 치르고 있는 동안 이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 시도 중이지요.


- 기자 : 유럽 내부 테러 조직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무수한 견해와 정보가 난무하고 있는데 수석님의 견해를 말씀해 주세요.


- 한스 마이어 : 목적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들의 생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결성되고 행동하던 7,80년대의 테러 조직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생존입니다. 계속해서 연합의 일원, 혹은 조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하면 조직을 해체하기도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조직이 해체되면 그들의 생명은 끝이었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동체로 결성되었고 조직의 탄생과 죽음이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필요 없는 조직과 연결을 정비하죠. 공격의 주체 또한 지령을 받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자체가 공격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을 거듭합니다. 모으거나 흡수하면서 조직의 역량을 키우면서 공격이 가능할 경우엔 그것을 거침없이 시행할 겁니다. 하지만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들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인력 시장에 내다 파는 것처럼 그들 자신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 버립니다. 흡수를 우리 관점에서 해체로 보니 차이가 나는 것이죠. 영광의 7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공격은 웸블리 사태 이후 정확히 4주년이 되던 날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유럽 연합이 결정적으로 해체되었죠. 오사마 빈 라덴은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네트워크가 해냈습니다. 추축국들처럼 그들 연합이 결국 우리를 넘어서게 된 거죠. 개인적인 감상이든 하찮은 회한이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생존이며 동시에 성장입니다. 개인적으로 난 그들이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고 봐요. 과대평가 일 수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더 큰 차원으로 유럽을 침공하고 우리에게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 목표란 국가의 역할 대체라고요.


- 기자 : 수석님, 현재의 견해는 최초로 공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의 신분으로써 이에 대한 파급력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데요. 현재 수석님의 주장을 좀 더 간결하게 다듬으셔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요?


- 한스 마이어 : 무엇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할까요? 기생? 생명 연장? 테러 산업? 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은 과거와 같은 이념의 불화와 그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폭력은 사영화 되었습니다. 과거 미군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폭력 이외의 수단과 과정을 모두 돈으로써 해결하고 있지요. 게다가 그들이 가진 폭력도 이익을 창출하기 쓰일 때가 많습니다. 납치, 살인, 밀수 등의 범죄는 언제나 그들이 영위하고 존속하기 위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행해집니다. 악질적인 부분은 그러한 폭력과 이익 창출이 사람을 대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죠. 납치를 하면 몸값을 요구합니다. 밀수가 필요하면 운송료를 요구하죠. 살인은 표적의 가치에 따라 값이 매겨집니다. 저도 한때는 제 머리의 값이 10만 달러를 넘겼었죠. 동부 장벽의 계획과 그것이 실제로 건설될 때엔 제 머리에 그 정도의 현상금이 실렸었습니다. 지속적인 생존과 끊임없는 공격... 이 두 가지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끈덕지게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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