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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n 20. 2022

냉철함 속 따뜻함을 전하는 일

사명감에 관하여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간호학과 학생으로서 임상 실습에 임하기 전, 나이팅 게일 선서식에서 읊었던 선서문의 내용이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인 고작 21살이었다.

선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지만 중요한 행사라는 걸 인지했기에 밤낮으로 동기들과 연습하며 입을 모아 숨 쉬는 구간까지 맞췄었다.


그리고 1000시간이라는 임상 실습을 끝마치고 국가고시를 치렀다.

이듬해 2월 나의 첫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입사하게 된 병동은 신경외과/정형외과 병동이었다. 가벼운 접촉사고나 검사를 위해 입원하는 경증의 환자분들도 있었지만 수술 후 케어가 중점적으로 이뤄지거나 중환자실에서 전실 후 밤마다 혼돈 증상을 보이는 중증도가 높은 상황의 환자들도 있었다.


응급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나이트 근무가 끝나가는 인계 시간 전 이리저리 할 일을 마치느라 뛰어다니며 땀 흘리기도 했다. 같은 의료진 혹은 보호자와의 트러블로 인해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신입 1년간 가장 힘들었던 건 '임상과 학부 때와의 차이에 대한 괴리감. 그리고 점점 생명의 무게에 대해 경중을 두는 나 자신'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병동은 1인실이 3개 포함되어있었는데, 주로 조용히 푹 쉬고 싶다는 부유한 환자들이거나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중증의 환자들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고, 길이를 알지 못하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그들만의 아지트인 셈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간호사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던 나는 점차 연차가 쌓여 한 근무시간대에 최고참으로서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가끔은 과에 보고하기 전 응급상황에 대해서 처치하는 일들이 필요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해 대비하고, 준비하고, 추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 일중 하나였다.




점차 생명의 귀중함이나 봉사정신, 사명감보다는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함과 스스로의 컨디션 난조에 힘듬을 겪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퇴사를 결심했던 어느 날, 1인실에 잠시 혼자 남겨져 가족들을 기다리는 할머님께서 컨디션 파악을 위해 라운딩을 돌고 있는 내게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얼마 남지 않은 것,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더 고마워.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자네는 복 받을 거야"

그러고 나서 간호사실로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내 차가운 이성 속 컨디션 묻는 한마디에, 혈관을 통해 들어가는 차가운 수액백을 만지는 손길에, 보호자에게 미리 설명해야 하는 환경 속 되풀이되는 멘트들에도 모두 따뜻함을 느끼셨던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져 올 때, 내게 전해주신 따뜻함이 되려 내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일깨웠던 것 같다.

점차 잃어만 가던 임상에 대한 기대와 직업적 사명감들이 톡 하고 건드려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환자분은 다음날 생을 마감하셨다.




이후로도 나의 겉으로 보이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만일의 상황에 대해 대비하고, 준비하고, 추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나는 차분히 그들의 안위와 건강증진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미리 숙지하고, 준비하고, 설명했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간호사로서 내가 환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당신의 삶이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때론 안 되는 부분에 대해 냉정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고 실천하기 힘든 부분을 독려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찰이 생길 때도 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의 따뜻함을 전할 것이다.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던 21살의 그 선서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더 짙어지는 오늘.


당신의 Stable(안정된, 안정적인)함을 누구보다 바라는 간호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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