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를 끄다

by 헬렌켈러



처음엔 선의였다.
정말로 그랬다.

고쳐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덜 아프게 살았으면 해서.

나는 문제를 보면
참지 못한다.
원인을 찾고
구조를 세우고
가능한 가장 빠른 해결로 데려간다.
그게 내가 살아남은 방식이었으니까.

상대의 불안,
모호한 말,
같은 선택의 반복,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동을 볼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조준했다.

레이저처럼.
정확하게,
짧게,
흉터가 남지 않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상대가 나를 볼 때
안도보다
긴장을 먼저 느끼고 있다는 걸.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방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돕고 있는 게 아니라
시술하고 있었다는 걸.

피부과 레이저는 아프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아프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딜 준비가 된 사람만
침대에 누운다.
그런데 나는 상대가 눕기도 전에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이건 없애야 해.”
“이건 네 삶에 필요 없어.”
“이렇게 하면 훨씬 나아질 거야.”
그 말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때는 몰랐다.

아픔을 통과하는 시간,
흔들리며 선택하는 과정,
실패를 자기 몫으로 가져가는 경험까지
나는 모두 생략시켰다.

빠르게.
깔끔하게.
내 기준으로.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구조적 우위였다.

레이저는 효과가 좋다.
하지만 반복되면
피부는 얇아진다.
스스로 회복하는 힘을 잃는다.

상대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나는 점점 더 확신에 찬다.


누군가는 환자가 되고
누군가는 의사가 된다.

그 순간
관계는 끝난다.

나는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돕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상대를 고쳐야 할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주 오래.


사랑이라고 믿었던 행동이
통제였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자존심이 찢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멈췄다. 손에 쥔 장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 상태로도
내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인가?”

대답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고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설계하지 않았다.
그냥 물러섰다.

치료하지 않기로,
개입하지 않기로,
회복을 대신 책임지지 않기로.

피부는 스스로 재생할 수 있을 때 진짜 강해진다.
사람도 그렇다.
나는 레이저를 끄고 의자를 떠났다.
상대를 버린 게 아니라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때 처음으로 사랑이
고통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은 지금도
조용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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