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이미 알았던 것들
이번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마음이 먼저 닳고 있었다.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고르기 시작했고,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고,
내가 웃고 있는지 확인하기 전에
상대가 흔들리지 않는지를 먼저 봤다.
소모는 그렇게 시작된다.
크게 아프지 않게,
조금씩.
그게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단계까지 와도
나는 그냥 들어갔다.
“조금만 더 가보자.”
“아직은 아니잖아.”
“이번엔 다를 수도 있잖아.”
그 말들로
나는 나를 설득했고,
그래서 한 번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소모를 배웠다.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조금 더 지쳐 있었고,
조금 더 말이 줄어 있었고,
조금 더 혼자였다.
이번에도
그 입구는 아주 조용했다.
누가 나를 잡아당긴 것도 아니고,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경보음이 울렸다.
“여기서부터는
네가 더 많이 잃는다.”
그 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나는 무서워졌다.
한 번은
그 소리를 무시하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한 번은
조금 늦게 듣고 한참을 회복했다.
그래서 이번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가능성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지금 들어가면
다시 같은 구조가 열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게
제일 어려웠다.
“조금만 더 있으면
괜찮아질 수도 있었잖아.”
그 생각이 계속 따라왔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문장은 언제나 나를
같은 결말로 데려갔다는 걸.
이건 포기가 아니라
회수라는 걸.
소모는 한 번 더 견디는 용기로
끝나지 않는다.
소모는 반드시,
나중에 대가를 요구한다.
이번에는
그 계산서를 받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눈을 감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프다.
솔직히 아프다.
아직 이름도 못 붙인 감정들이
가슴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나를
제때 데리고 나왔다.
예전의 나는 끝까지 가야만
사랑인 줄 알았다.
지금의 나는 안다.
사랑에는
끝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순간을 알아보고
멈출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조용히 울게 한다.
성장은
끝까지 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서 내려와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 온다는 걸.
나는 또 한 번
사랑의 다른 얼굴을
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신
나를 잃지 않는 법을
확실히 배웠다.
그리고 그건
예전의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선택이었다.
이번에는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