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사랑을 자본금처럼 물려받는다.
기대어도 괜찮다는 감각,
실패해도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저장한 채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출발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빚을 안고 시작한다.
나는 그런 쪽이었다.
관계는 늘 긴장이었고
애정은 기쁨이라기보다 관리에 가까웠다.
좋아해도 계산했고,
머물러도 떠날 준비를 했다.
그게 성격인 줄 알았다.
내가 예민하고, 차갑고,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출발선이었다는 걸.
부모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최선 안에는 없던 것들이 있었다.
안전,
일관성,
그리고 믿어도 된다는 감각.
그 부재는
고스란히 내 삶의 통장이 되었다.
나는 마이너스에서 살았다.
불안은 기본 비용이었고
관계는 늘 계산서부터 떠올려야 했다.
그래서 벌기 시작했다.
사랑을 요구하는 대신
불안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기대기 전에 구조를 만들었고
무너지기 전에 나를 세웠다.
한 번 버티고,
한 번 돌아보고,
한 번 더 책임졌다.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고 싶지 않았고
내 인생을 빚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자가 되지 않았다.
다만, 적자는 끝났다.
이제는
기대해도 무너지지 않고
혼자여도 불안하지 않다.
누군가에게서 받지 않아도
나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원금으로 산다.
누군가에게서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 끝에 남아 있는 것들로.
이 원금은
화려하지 않고,
자랑할 만하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하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관계를 담보로 나를 내놓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걸 얻기까지
나는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아깝지 않다.
원금이 있다는 건
이제야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