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
"당신 그렇게 하는 거 갑질이야." 남편이 내게 한 말이다. 이 대사를 해석하려면 하루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주말에 기분 좋게 나갔다가 돌아올 땐 남편이 잔뜩 예민해졌다. 종종 있는 일이고 내가 남편 눈치를 보는 이유다. 남편이 여자 셋을 내려주고 혼밥 하러 떠났다. 혼밥은 남편의 힐링요소다.
아빠 된 지 10년이 됐는데도 발전이 없네! 애가 짜증을 낼 수도 있지! 고작 그 정도로 예민해지다니! 같이 다니기 싫다! 주말마다 남편 눈치 보는 것도 지긋지긋해!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남편 들으라고 애들한테도 화를 냈다. 남편은 자기도 열심히 살고 있고 서로 바꿔서 살아보면 좋겠다고 항변했다.
험악한 분위기에 애들이 무섭다고 운다. 작은애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큰애는 좀 컸다고 눈 비비는 척하면서 운다. 큰애 기억에 엄마 아빠가 세 번째로 싸운 거고 작은애 기억으로는 처음이다. "혹시 욕처럼 들린 말이 있었니?" 애들한테 물었다. 작은애는 "뻔뻔하다고 말한 거 욕 같았어."(번번이 그런다고 말한 걸 뻔뻔하다고 들었다) 큰애는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게 욕처럼 들렸어." 애들 대답을 들으면서 내가 선은 안 넘었구나 안도했다.
다음 날 남편이 보낸 문자를 씹었다. 전화도 안 받았다. 깨 볶으면서 산지 12년 됐는데 우리 집 방앗간 문 닫았다. 퇴근하고 온 남편이 건네는 인사에도 시선을 피했다. 그랬더니 "당신 그렇게 하는 거 갑질이야." 말이 남편 입에서 나온 거다. 직장 내 갑질은 들어봤어도 가정 내 갑질은 처음이다.
종이와 펜을 들고 남편과 방에 들어갔다. 어떤 점이 힘든지 남편 말을 받아 적었다. "밖에서는 내가 주로 작은애를 돌보는데 작은애가 짜증을 내면 달래느라 이것저것 하게 된다. 주말에 이틀 연속으로 아내 일정은 무리다. 매주는 아니더라도 격주 반나절은 자유시간을 갖고 싶다. 박사과정 가고 싶다는 말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아실현 욕구가 높은 아내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산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를 지경이다. 아내는 화가 나면 사람을 괴롭히면서 푼다. A로 화가 났으면서 B로 시비를 건다. 이건 뒤통수치는 거다. 아내가 자기 화났다고 입 닫고 분위기 잡는다. 입을 열기까지 하루가 걸린다. 바로 이점이 갑질이다."
나는 남편 없이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싶어졌다. 주말에 내가 애들을 도맡고 남편은 실컷 자유시간 가지는 게 해결책 같았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합의를 봤다. "외출했을 때 작은애는 아내가 돌본다. 주말에 연속으로 아내 일정을 잡지 않는다. 남편이 혼자 마트에 가서 힐링하게끔 한다. A로 화가 났으면 A로 화를 낸다. 싸운 걸 무마하려고 억지로 스킨십하지 않는다. 애들이 싸우거나 짜증 낼 때 바로 개입하지 않는다. 애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도와주지 않는다. 주말에는 오전에 공부를 끝내도록 지도한다."
누가 더 힘드냐로 이어진 싸움이었다. 나는 "고작 그 정도로 힘들어해?" 마음이 컸다. 남편은 "그럼 바꿔서 살아보든가" 입장이었다. 남편의 고충사항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다 맞는 말이다. 이 집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