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적 삶
현재 우리 사회는 면역학적 시대(규율사회)에서 세계화의 시대(성과사회)로 변화했다. 면역학적 시대는 적과 타자가 명확하던 시대이다. 이질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제거의 대상이 되어 공격하고 '~해서는 안된다'의 규율이 강했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자아는 타자의 공격으로 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면 내 편에 서서 타자를 부정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적,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이다. 낯선 것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이국적인 것이고 여행객의 즐거움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수용한다. 타자를 위협이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같은 것이 넘쳐 흐르게 되고 내 안의 저항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 할 수 있다'로 느끼기에 피로하고 내 몸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자아는 성과의 주체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해내어 성과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과의 전쟁상태이고 자기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 상황에선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그 누구도 노동하라 명령하지 않았지만 개개인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고 자아가 포로이자 감독관이고 희생자이자 가해자인 셈이다.(p44) 성과에 대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하는 것이다.
성과에 대한 압박,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은 없다라고 믿는 이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가는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p48)라며 사색적 삶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외부의 자극에 내맡겨진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것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는 것이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행동이 노둥수준으로 전락하지 않고 그 행동이 주도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우리는 제거하며 살아왔다. 특히 공포, 불안, 두려움, 슬픔 등의 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이다. 슬픔이 느껴지면 왜 슬퍼 라며 기쁠 수 있는 자극을 찾는다. 다른 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부정성이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준다 말한다. 부정적 힘은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부정성을 수용한 뒤 잠시 멈추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이런 피로한 사회에서도 주체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 p70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한 공간, 무차별적 공간이다. P68
늘 밝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p71
피로사회.. 내가 처음 이 책을 접할 때는 부정적 의미의 피로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말하는 깊은 피로는 이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은 혼자서 하는 것이지만 공동체 속에서도 가능하다. 개개인이 이완이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그 공동체 속 개인은 개개인 사이의 적당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속의 모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피로하면 혼자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이는 평소 공동체 속에서 '브레인 도핑' '신경향상' 즉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개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체 속에서 떨어져 나와 타자를 부정하며 개인으로 있으려 한것이다. 각자가 다 이완된 상태라면 그 사이의 공간은 있지만 없는 것.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상태... 그 상태에선 나 혼자 있어도 남과 함께 있어도 같은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궁극적 도달지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