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다리도 제 허리 뒤쪽으로 뻗으세요”
여행의 마지막날은 항상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그건 잠시나마 정들었던 그 나라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이 여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네팔과 인도 여행 중 맨발로 아기를 업고 구걸하는 어린아이들 모습이 아직도 마음 한쪽에 화인(火印)처럼 아리게 남아있다.
계급주의 사회인 인도는 불가촉천민이 브라만 계급의 그림자만 밟아도 카스트제도에 따라 살인을 당했었다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모로코는 최근 안정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기 때문인지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밝고 아름다워 카사블랑카를 떠날 때도 마음이 한결 편했다.
카사블랑카에서 도하로 가는 비행기 좌석이 한산하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부르카를 입은 할머니들과 칸두라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단체로 오셔서 지정된 좌석을 찾느라 분주했다.
제발 내 옆 2 좌석이 계속 비어있길 바랐지만 희망도 잠시, 하얀 부르카를 입은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창쪽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간단한 목례를 하고 검색한 영화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화면에 띄운 코란을 2시간째 읽고 있었다.
이슬람 신자들은 죽기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를 꼭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년 폭염에 메카를 가기 위해 사막을 걷다가 혹은 밀집된 순례자들 수천 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났다.
카타르 항공은 이슬람인들이 대부분 탑승하기 때문에 라마단 기간 동안 낮에는 금식을 한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외국인들에게 미리 저녁을 나누어 주느라 승무원들이 분주했다.
테이블에 놓인 저녁을 혼자 소리 내서 먹기가 좀 민망해 나는 빵과 푸딩을 옆 좌석 할머니께 드렸더니 두 손으로 합장하듯 받으시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셨다.
종일 굶은 사람들 옆에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게 좀 미안해서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내고 기내 선반에서 가방 꺼냈다
여유 있게 가져간 마스크를 할머니께 몽땅 드렸더니 내 팔을 두드리며 고맙다는 표현을 하셨다.
나는 가방을 뒤져 남아있는 초콜릿과 물티슈를 또 드렸더니 이번에도 내 팔과 어깨를 연시 두드리며 긴 차마를 들어 올려 속바지 주머니에 넣으셨다.
그 모습이 고쟁이를 입은 우리네 할머니를 닮아서 따듯한 정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해자 지자 그들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할머니가 식판에서 과일을 집어 나한테 주길래 난 두 손으로 배를 동그랗게 만들어 보였더니 웃으셨다.
할머니의 식사가 끝나자 우린 구글 번역기 없이도 손짓과 표정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할머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난 일생에 한번 메카를 가는 길이에요”
“할머니~ 순례길 조심하시고 아프지 마세요~”
“그래요 어디서든 댁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게요”
많은 손짓과 표정이 오고 간 후 내가 카메라를 켜고 할머니께 다가가자 브이를 한 내 손가락을 따라서 할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나는 2 끼니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느라 불편한 무릎을 두드리다 코란을 읽던 할머니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내 다리를 가리키며 옆좌석에 쭉 펴라고 하시더니 아픈 내 무릎을 계속 주무르며 기도 같은 걸 하시다 결국은 내 다리를 당신의 허리 뒤쪽으로 끌어당기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할머니 다리도 제 허리 뒤쪽으로 뻗으세요”
“아니에요 난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어릴 적 외갓집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든 기억이 떠올라 울컥하는 사이 난기류를 만난 기체가 하강하며 심하게 흔들렸다.
공포에 질린 내 얼굴을 보자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어깨를 토닥이며 기도를 하셨다.
꼭 잡은 할머니의 손이 얼마나 센지 난기류마저 할머니의 손에 달린 듯 나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긴 시간 할머니와의 깊은 서사가 끝나자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목소리를 듣고 우린 서로를 껴안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할머니 건강하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댁도 건강하게 조심히 돌아가요”
도하 공항에서 메카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이동하는 무리들 속에서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이자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인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