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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Feb 16. 2022

생활의 향기

아직은 아름다운

  

  단칸 사글셋방에서 2년, 13평 아파트에서 10년 동안 연탄을 갈면서 나는 꿈이라는 것을 꾸었다. 정원이 있는 아담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방을 조금 많이 만들어 나만의 서재도 하나 가지고 그 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고.

 창문을 열면 푸르른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도 괜찮고 바다가 가슴으로 달려오는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고. 언젠가는 그 꿈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포항에 살 때는 비학산 골짜기에 초가집 한 채를 산 적이 있었다. 산딸기가 많다는 비학산으로 생수를 뜨러 가는 지인을 무작정 따라갔다가 산새에 반해서 빈 집에다 설레는 마음을 부려놓은 것이었다.

 본 채와 아래채가 있었는데 아래채는 외양간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이미 지붕이 내려앉았고 창호지를 바른 문짝은 삭을 대로 삭아 만지면 나무가루가 손 끝에 묻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본 채는 도배도 깨끗이 되어 있었고 부엌은 입식으로 개조를 해서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마당이 무척 넓다는 것이었다. 또한 앞뒤에 텃밭이 있고 커다란 감나무가 열 그루 정도 있어서 더더욱 가슴이 설레었다. 그 집을 사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기뻤던지 아는 사람들한테 모두 전화해서 흥분을 쏟아부었다. 우리 집 멋있게 꾸며서 문학인들의 모임 장소 만들 것이니까 놀러 오라고.

 모두들 자신들이 집을 산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나는 날마다 자랑을 하지 않으면 그 집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자랑을 하고 또 했다. 어디서든 집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고 너도나도 열쇠를 빌려달라며, 집필실로 써야겠다며 설렘을 피워 올렸다. 나는 그 집애착이 갔다. 내게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 줄 공간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난 집을 꾸밀 계획을 세웠다.

마당에는 예쁜 금잔디를 깔고 입구에는 사립문 대신 나무로 팻말을 세워야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마당가에는 꽃밭을 만들어 키 작은 채송화를 맨 앞줄에다 심고, 맨드라미, 칸나, 목단, 국화, 가득 심어야지. 손톱을 예쁘게 물들일 봉선화 심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지. 내 친구가 유난히 좋아했던 샐비아 심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지.

 앞 텃밭에는 토마토와 오이 가지 딸기를 심고, 뒤 텃밭엔 상추와 무와 배추를 심어야지.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열리면 곶감을 깎아 처마 밑에 달아 놓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밤새 문학을 논야지. 이야기하다 배가 고프면 빵을 구워 향기로운 커피와 먹으며 또 다른 미래를 꿈꿔야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런데 일 년 뒤에 그 집을 팔고 말았다. 주렁주렁 열린 감을 한 번 딴 것 외에는 그 어떤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말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도란도란 행복을 피워 올렸을 곶감들이 친정 집 처마 밑에서 얼굴내리고  있을 무렵, 난 집안 사정으로 내 꿈을 접고 말았다. 방 안에 한 번 앉아보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 손으로 넘기고 말았다. 집을 팔았다는 것보다 꿈을 접어 버렸다는 사실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나는 광양으로 이사를 왔고, 내가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을 접어버리고 살아온 세월 동안 삭막해졌던 가슴에 따뜻한 모닥불이 피어오르기 시작다. 생기 잃어버렸던 눈동자엔 꿈이 반짝이고 상실되었던 의욕이 되살아나고 피폐해져 버렸던 삶에 희망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어머니뻘 되는 여류 시인을 만나게 되면서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너무도 곱고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닌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나도 그분처럼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은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마흔넷... 참으로 좋은 때지.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나이이지. 무엇을 시작해도 늦지 않지...

 목련꽃처럼 환한 미소로 말씀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었다. 무엇을 시작해도 늦지 않는 나이.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내 꿈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아름다운 나이-마흔넷.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래서 나는 다시 꿈을 꾸고 있다.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나의 꿈을 다시 찾아오겠다고. 시골에 작은 집을 하나 장만해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보겠다고. 그때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라도 모두 실천해보겠다고.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다.

(흔 넷이었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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