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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Feb 22. 2022

생활의 향기

유월의 바람

 아침에 일어나니 창문 밖에 서 있는 가로수에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가야산 봉우리에 걸린 하얀 운무 고리가 산 중턱까지 잘라먹고 있다. 잘 생긴 인도 왕자가 터번을 두르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떠나고 싶다는 갈망이 심장을 차고 올라온다. 늘 동동거리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용솟음친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치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자동차 안으로 들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심호흡을 하고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가쁜 숨이 가라앉는다.

 잘 다듬어진 주택단지를 벗어나자 만조가 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나절에는 물이 꽉 찼다가 낮이 되면 갯벌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바다는 볼 때마다 새롭고 신비롭다. 물이 빠져버린 바닥에는 내 키만 한 바다풀들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엔 모두 바닷속으로 숨어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옥곡을 벗어나자 푸른 들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조금 더 달리니 잡목들이 우거진 숲이 나온다. 음영을 드리운 길 위에는 안개가 더욱 짙게 깔려 있다. 끝없이 이어진 안개 숲을 헤치고 차는 잘도 달려 준다. 살짝 열어젖힌 창문을 타고 안개 내음이 달려 들어온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나나 무수꾸리의 사랑의 기쁨이 그런 바깥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 듯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내용을 보면 사랑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목을 왜 사랑의 기쁨이라 했을까.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온전하고 충만한 행복이기에 이별을 했다고 하더라도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이순이면 어떤 일을 들어도 이해가 된다고 했는데, 나이를 제대로 먹지 못했을까.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이 지난 지는 20년이 되었지만 나는 늘 작은 것에도 흔들리고 갈팡질팡하는 일이 많다. 사랑이라는 말만으로도 설레고 들뜨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섬진강을 지나고 쌍계사 가는 길로 접어들자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유월 햇살 속에 드러난 신록이 농익은 완숙미를 자랑하고 있다. 가슴을 뛰게 만든다. 오월의 나뭇잎이 반짝이는 설렘이라면, 유월의 나뭇잎은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정이다. 그래서 나는 오월의 눈부심도 좋지만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유월의 신록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내 영혼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차창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짙푸른 유월의 신록 빛에 취했는지 차도 자꾸만 뒤뚱거린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속 페달 위에 올려진 발에 힘을 준다. 귀가 먹먹하도록 높은 고지대를 지나고,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이나 달리다 보니 칠불사라는 절이 나온다. 반갑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절을 향해 걷는다. 맑고 투명한 향내가 폐부를 타고 들어온다. 머리가 맑아진다. 산세가 함박처럼 오목한 곳에 자리 잡은 칠불사 마당에 들어서니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작은 절이라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들어서는 관광객들의 어깨 위로 눈부신 유월 햇살도 함께 얹혀 따라온다.

 대웅전을 둘러보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온다. 절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투명한 푸른빛이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 심호흡을 크게 해 본다. 가슴속으로 산의 정기가 달려들어 온다. 막혔던 세포들이 활짝 열린다. 지금까지 내 몸을 억누르고 있던 바윗돌들이 남김없이 사라진다. 비로소 몸이 가벼워진다.

 계단에 앉아 먼 산으로 시선을 던져본다. 절을 둘러싸고 살아온 탓인지 나무들의 자태 또한 온화하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고 마음이 편안해져 온다. 저런 모습들을 보려고 사람들은 산을 찾는 걸까. 고개를 들어 계단을 덮고 있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은 또 다른 세계를 데려다준다. 실눈을 타고 들어오는 부신 햇살들이 천상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성스러운 기운을 하고 있다. 나뭇잎들은 모두 다른 빛을 내고 있다. 똑같은 햇살을 받아 자랐지만 자신만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누가 덜 주지도 더 주지도 않았건만 햇살을 잘 받은 나뭇잎은 색깔도 선명하고 생명이 넘친다. 하지만 어떤 잎은 늘어지고 탈색되고 벌레가 먹어 축 쳐져 있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는 누구나 똑같지만 살아가는 동안 천태만상으로 변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슬픔과 기쁨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 삶을 눈부시게 만들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절망과 고통, 슬픔과 좌절-그것은 모두 나 스스로가 불러온 것들이다.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그 마음을 버릴 수가 없기에 얻는 고통들이다.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나를 버려야 한다. 고요히 서서 주는 대로 받으며 욕심들을 말끔히 비워내야 한다. 주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고, 다른 나뭇잎들에 가려 햇살을 받지 못해도, 영글기도 전에 떨어져 죽는다 해도 저항하지 않고 말없이 순응하는 저 나뭇잎들처럼 말이다. 답답함과 불안함과 불만들 그리고 애틋함도 한낱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어 시간 앉았다가 내려오는데 소나기가 쏟아진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치 내리치는 빗줄기를 피하여 찻집으로 들어간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빗줄기는 더 거세어지고 있다. 영원토록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이다.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는 사이 차창을 때리던 빗줄기가 운무를 만들어낸다. 앞산 가득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개울물 소리가 귀를 때린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앉아 그 빗줄기를 바라본다. 내 의식이 빗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간 거짓말처럼 햇살이 나타난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명쾌하다. 물방울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찻집 안으로까지 스며든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시동을 거는 손길 위에 힘이 솟아난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일 게다. 안개가 끼는 날도 있고, 햇살이 눈부셔 설레는 날도 있을 것이고, 소낙비가 쏟아졌다가 다시 찬란하게 드러난 햇살 속에서 미소 지어보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충만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삶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나와 끈이 닿아있는 주위의 인연들은 구속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나와 크게 작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 그들에게 더 많은 사랑으로 다가설 것이다. 아낌없는 사랑을 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고 달려온 싱그러운 유월의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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