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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Dec 24. 2023

흐르는 상념들 속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새 달력을 구해 와야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약국에 다녀오는 길에 농협에 들려서 내년도 달력을 얻어왔다. 벽걸이용 두 개와 탁상용 달력 하나를 받아 들고 집으로 오는 데 기분이 묘했다. 올 한 해가 다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별 변화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이에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이 허망하게 달려온다.

 35년이 넘게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로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만 지내는 내게 시간의 흐름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달력을 보지 않으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지낸 지 오래되었다. 다섯 군데나 되는 학교로 방과 후 강사로 나가고, 토요일에는 공공도서관에서 어린이 글짓기 지도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저녁에 인문학 글쓰기 강의를 하러 다녔던 때는, 요일과 시간은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진으로 이사를 오고, 헬스장과 마트 그리고 쓰레기 버리러 가는 것 외에 밖에 나가는 일이 전혀 없는 지금은 날짜와 시간은 무의미해졌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끔씩 병원에 가서 날짜 적을 일이 생기면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볼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내가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30분 동안은 시집을 읽고, 20분은 스트레칭을 하고, 헬스장에 가서 1시간 20분은 러닝머신 위를 걷고, 또 하루에 단편 두 편 이상은 꼭 본다. 좋아하는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도 넷플릭스에서 찾아보고 글도 쓴다. 아픈 고양이에게 하루 네 번씩 약을 먹이고 수시로 밥과 간식도 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식사 준비를 비롯하여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씩 내가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 같고, 세상과 등을 돌린 채 사방이 막힌 공간 속에 홀로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말할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낀다. 고양이에게 말을 걸지만 나이 들고 몸이 아픈 고양이는 그런 내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고 잠을 청해버린다. 그럴 때는 망망대해에 표류한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가끔씩 문협 회원들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자는 문자가 오면 시간이 될 때 연락할게요,라는 답을 보내고, 막상 전화하지는 않는다. 서산에 살고 있는 여고 동창생이 놀러 온다고 해놓고 왜 안 오느냐며 전화를 하면 몸이 좋지 않아서,라는 핑계를 댄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린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방과 후 학교에 가서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누었던 때가 있었던가 싶게 그 시간들이 아득하다. 하루에도 몇 팀씩, 한 달에 한 번도 쉬는 날 없이 논술 과외를 하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말을 많이 했던 30대의 시간들이 꿈만 같다. 지금의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목소리마저 잘 나오지 않아서 말하는 것도 힘이 들고 답답하다 보니 누구를 만난다는 사실이 공포에 가까울 정도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어느새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아직 당진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문협 회원으로 있으면서도 문협 행사에 나가는 것이 두렵고, 겨우 작품만 보내면서 지내고 있을 뿐이다. 포항에서 20년 광양에서 20년을 살면서 문학판 속을 숨 가쁘게 뛰어다니면서 지냈던 일들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나이 탓인지 주위에서 들려오는 지인들과 친구들의 부음 소식은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든다. 나 또한 언제 어느 순간 지인들에게 그런 소식을 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협심증 진단을 받고, 위장이 기능을 하지 않아 약을 먹고 있는지도 어느새 5개월이 지났다. 밥을 먹고 나서 한 주먹이나 되는 알약을 입속으로 털어 넣을 때마다 이 약들이 내 생명을 이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잠잘 시간이 모자라 길을 가면서도 졸고, 운전을 하면서 빵과 우유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시간을 아껴 쓰며 살았다. 너무 빨리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많다. 자고 싶으면 자고, 책 읽고 싶을 때 마음껏 읽고, 텔레비전이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볼 수 있다. 그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긴장감이 결여되어 버렸다. 쫓기는 시간 속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들은 긴장감을 준다. 살아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함께 활력소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많은 지금의 나는 긴장감을 잃어버렸다. 긴장감이 없는 삶은 생기가 없다. 생기가 없는 삶을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의욕이 상실된 삶은 우울을 불러온다.

 며칠 전에 온 눈들이 꽁꽁 얼어붙어있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삶도 하루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발버둥 친다고 해서 삶이 내 몫으로 온전히 남아주지는 않는다고.

 한 장 남은 달력을 벽에서 걷어내고 새 달력으로 바꾼다. 2024년 1월의 달력 앞에 2023년 12월의 달력이 한 장 더 붙어있다. 1부터 31일까지 쓰인 숫자 윗자리에‘행복 가득한 새해 되세요’라는 덕담이 쓰여 있다. 이제 일주일 후면 새해가 된다. 나는 또 한 살을 더 먹고 고령자 나이 쪽으로 가까워진다. 그것을 생각하면 쓸쓸해진다.

 내년의 내 삶은 또 어떻게 펼쳐질까. 내년 이 시간에도 나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을까. 아직도 남은 올해의 날들은 또 어떻게 이어지고 나는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정답은 나도 모른다. 신만이 아는 영역이니까.

 분명한 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료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들에 감사하며, 지인들에게 안부의 전화라도 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오늘 이 시간은 내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귀하고 소중한 순간이니까. 내년 이 시간에 정말 올 한 해는 시간을 귀중하게 잘 썼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아 인사를 올린다.

 남은 올해의 시간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고, 밝아오는 새해에도 건강 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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