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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Feb 26. 2022

일상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린다

with 코로나

 몇 달만 견디면 잡힐 줄 알았던 코로나는 해를 거듭하며 뻣뻣하게 버티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위드 코로나를 외치며 화해하게 만들었다. 패배감에 씁쓸하지만 인정할 건 한다. 우리에게는 일상의 정상화가 간절하다. 밉지만 요 녀석과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     

 독서회의 회원 중 한 언니가 연락이 두절이다.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떨어져 당분간 쉬겠다는 말만 남겨두고 참석 안 한지가 반년이 되어간다. 며칠 전 어렵사리 전화연결이 되었다. 언니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다. 병원에서는 어렵다는 부정의 답을 했지만 언니는 한 가닥 기적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독한 치료로 기력이 떨어져 외출도 어렵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었다. 말문이 막히고 목이 메었다.      

 코로나로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온 세계가 난리 통이다. 사람들도 신경이 온통 거기에만 집중되었다. 코로나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어찌 되는 거 마냥 근심 보따리를 짊어졌다. 코로나로 여전히 힘들다. 여행, 항공분야와 특히 자영업자들은 생계에 타격이 크다.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시계를 메달아 놔도 국방부의 시계는 돈다’ 듯이 코로나 속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들판의 농작물은 수확을 하고 공장의 기계는 부품을 찍어낸다. 지구 한편에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났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노인은 생을 마감한다. 환경미화원은 컴컴한 새벽녘에 나와 거리를 청소하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싸운다. 코로나로 정지된 시간에 산다고 여겼지만 세상은 돌아갔다. 기대하던 백신이 나오고, 갈망했던 백신 접종 후 증상에 대해 초조해하고 호들갑 떨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후유증에 불안해하며 근심했다. 그 시각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기 암환자나 시한부 환자는 우리들 옆에 있었다.      

 언니와의 인연은 십여 년의 세월이다. 독서모임에서 만나 책 읽고 소통하며 교제했다. 명랑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책을 늘 끼고 살았다. 작년부터 노안으로 돋보기를 껴도 책을 장시간 보는 걸 힘들어했다. 현재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뇌에 물이차서 각막에 손상이 왔다. 책은 물론이거니와 간판의 글자조차 읽기가 힘들다. 전화기 너머로 언니가 당부한다. “건강하고 눈 좋을 때 책 많이 읽어. 몸이 이러니 책을 못 읽는다는 것이 슬프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힘은 없지만 여전히 밝은 목소리다. 언니가 생각하는 올 한 해의 코로나는 어떤 것일까? 생과 사를 넘나들며 생명줄 부여잡고 있는 언니의 눈에 비친 코로나와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할지 궁금했다. 코로나가 별거 아니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팬데믹을 선언할 만큼 코로나는 대단했다. 천문학적인 숫자를 기록하는 피해와 자유롭던 발을 꽁꽁 묶어 놨다. 그러나 우리는 버텼고 살아냈다.      

 갑갑했던 마스크 착용에 적응되었고 감기 같은 질병예방에 효과를 본 터라, 마스크 애호가가 될 지경이다. 이동과 장소의 제한에 답답했지만 각자 방법을 찾아 움직인다. 나는 오히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잦은 술자리를 피해 귀가시간이 앞당겨져 직장인들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증가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긍정의 요소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포스트 코로나에 준비하면서 다시 적자생존을 배울 것이다. 인간에게 차등 없이 유일하게 공평한 게 시간이다. 부자라고 하루가 48시간은 아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상의 시간이다. 가상화폐니 메타버스니 하면서 가상의 공간과 재물에 가치를 두는 시대다. 우리의 시간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보상도 대체제도 저축도 없다. 코로나에 발목 잡히기엔 억울하다. 나만 죽도록 힘든 거 같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옆을 보면 나보다 힘든 이가 줄을 썼다. 고통은 상대적이다. 국가재난지원금 푼다는 소식에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은 나라 걱정을 먼저 하신다. 전쟁과 기근을 경험하신 그분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문득 몇 해 전 아버지가 하신 말이 떠오른다. 매스컴에서 연일 경제가 어렵다고 나발을 불 때였다. “식당에 가보면 외식하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더라. 어렵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라니까.” 아버지는 정말 어려우면 허리띠 졸라매고 근검절약해야 하는데, 소비할 거 다 하면서 어렵다는 말은 이치에 어긋난다고 여기셨다. 소비 또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 여기는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놀랄 발언이다. 아버지 말씀은 우리들에게 너무 엄살떨지 말라는 의미다. 이 또한 다 지나가니 어제와 같이 오늘을, 또 내일을 살다 보면 살게 되는 거다.      

 이 년 넘게 코로나랑 겨뤄 봤으니 미운 정도 들었다. 영영 이별이 어렵다면 얼추 맞춰가며 사는 수밖에 없다. 단어의 조합도 예쁘게 만들었다. ‘With 코로나’. 코로나를 무시할 수 없지만 우리에겐 귀한 일상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양보할 수가 없다. 치료 중인 언니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지 아무도 모른다. 언니는 코로나보다 더 끔찍한 암 덩어리를 지녔어도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의 말이 먼저 나온단다. 언제까지 나도 투정만 부릴 수는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 나의 시간을 귀하게 쓰리라 결심한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생활하다 보면 고얀 코로나 녀석도 시들해지겠지. 언니의 당부대로 책을 펼쳐본다. 오늘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이 모든 일상의 시간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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