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우임 Feb 26. 2022

아들의 눈물

난 아들과 통하고 싶다

 오전 이른 시간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자주 하는 성향도 아니고, 고작 간단한 안부 톡을 하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걱정이 앞선다. “오, 아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자녀가 독립해서 나가면 생각지도 않은 근심이 늘 따르고, 이렇게 불쑥 전화가 오면 긴장하게 된다. “엄마 뭐해? 그냥 전화해 봤어.” 아들이 무뚝뚝하게 묻는다. “엄마는 잘 있지. 너는 별일 없지?” 나의 물음에 아들이 조용하다. 몇 초간의 침묵 뒤에 수화기 저편에서 아들이 울기 시작한다. 스무네 살 다 큰 아들이 소리 내어 엉엉 운다.      

 아들이 첫사랑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어학연수에서 만난 아들의 여자 친구는 일본인이며, 연수를 마치고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곧 상봉하리라 약속했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발이 묶인 것이다. 견우와 직녀처럼 장거리 연애 일 년여 만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뭘 그딴 일로 사내 녀석이 우니’ 했다가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될까 봐 조심스레 위로해 줬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힘내라고 해줬다. 아들은 지금 일생일대의 큰 위기를 맞이해서 힘든 시간일 것이다.      

 대학 때 나는 지독한 짝사랑을 했다. 가슴앓이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제대로 내색도 못하고 늘 그 남자의 주변을 서성이다 결국 단념했다. 그 남자 군 입대하는 날, 입영열차 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눈물을 삼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버스도 타지 않고 그 빗속을 무작정 걸었다. 우산을 받쳐 든 채 안으로 삭히는 울음을 빗소리에 얹어 토해냈다. 스무한 살 여학생은 세상을 알기엔 너무 어렸다. 그때 흘린 눈물이 기나긴 인생에서 병아리 눈물 같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난 눈물이 많다. 갓난아이 때부터 주야장천 울었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이름을 잘못 지어서 그러나 싶어 철학관에 가서 이름을 바꿔 보려고도 했단다. 주책맞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양파 썰 때도 주르륵 흐르고, 드라마 볼 때도 눈물샘이 터져 눈물 콧물 범벅이다. 심지어 기쁠 때도 감격해서 찔찔 짠다. 책을 읽고 새드 앤딩으로 마무리되면 또 운다. 감동 깊게 읽은 책을 옆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도 감정이입이 되어 눈시울 적신다. 내 몸 안의 수분 중에 눈물로 배출되는 비중이 높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다가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결혼은 동화가 아니고 리얼 다큐멘터리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도 울었다. 울다 보니 새색시에서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싱겁게 속삭인다. 흘렸던 눈물을 도로 담아 넣으면 새색시로 돌아 갈려나 하며 헛웃음이 나온다.     

 아들 녀석 군 입대하던 날, 논산훈련소까지 배웅했다. 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군에서 마련한 강당에 들어가서 아들에게 손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아...’ 첫 줄을 쓰고 나서 오랫동안 아무런 글을 적을 수 없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 편지지를 축축이 다 적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닭똥 같은 눈물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남편 때문에 흘린 눈물은 닭보다 훨씬 큰 타조 똥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 같다.     

 아들에게 편지를 적어본다. 

 “아들아, 첫사랑의 실연을 겪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 거야. 장밋빛이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암흑일 테지. 계획하고 준비했던 단계별 목표도 의미가 사라졌을 것이고. 아들아, 울고 싶을 때 펑펑 울어라. 다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질 거야. 맘을 추스르고 우리 아들이 다시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랄게. 엄마가 옆에서 응원할게.”

 이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아들은 언제쯤 알게 될까? 소리 내어 맘껏 울지 못 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티슈 옆에 놔두고 우는 건, 그 핑계 대고 날 잡아 아리아를 뽑아내듯 울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약이 많다. 그중에서 눈물은 눈치가 보인다. 시도 때도 없이 수도꼭지 튼 거 마냥 눈물을 보이면 빈축사기 십상이다. 반대로 울어야 하는 장소에서 눈물이 안 나와도 난감하다. 장례식장을 빈번하게 가야 하는 나이 때가 되었다. 영정사진 앞에 국화꽃 놓고 묵념하는 시간에만 숙연해 질뿐, 격한 애도의 감정이 나오질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곡소리하는 모습을 최근에 본 적이 없다. 근교에 애완동물 장례식장이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대성통곡이 이어진다. 부모 초상에는 안 울면서 강아지 초상에는 목을 매는 모습에 오해를 했다. 아마 그들도 내가 드라마 볼 때 우는 거랑 비슷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 아니라 솔직한 감정의 씨앗인 거 같다. 연극무대에서 열연하는 배우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보이면, 관객도 일체가 되어 함께 운다. ‘통’이 아닐까. 난 아들과 통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