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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Mar 02. 2022

나의 수저

귀한 대접은 내가 만든다

 친구랑 남포동 거리를 거닐다가 어느 점포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옻칠 공방점이다.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들어가 본다. 여느 공방과는 달리 수저만이 전시되어있다. 환갑을 훨씬 넘긴 여사장님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시며 “부담 갖지 말고 찬찬히 둘러보세요.” 하신다. 우리의 시선은 가계 안에 가지런히 진열된 수저들을 보느라 바빴다. 물건을 파는 곳 이라기보다는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같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을 겸비한 반짝반짝 광택의 스테인리스 수저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무 소재의 수저가 낯설다. 사극 드라마 속의 가난한 평민들의 수저가 떠오른다. 친구는 몇 해 전부터 나무 수저를 사용하고 있단다. “궁상맞게 웬 나무?” 의아해하며 내가 물으니, “우연한 기회에 사용하게 되었는데 좋더라.” 하며 대답한다. 친구의 꼼꼼한 관찰에 호기심이 발한 사장님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신다. “목공예 수저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제가 설명 좀 해 들릴까요?”     

 차분하면서도 쉽게 옻칠 나무 수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시는데, 장인의 포스가 느껴진다. 모두 수공예로 만들어지며 화학약품이 아닌 천연 옻으로만 칠해져 건강까지 염두에 둔 수저는 마치 작품 같았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작품이다. 주 고객층이 내국인보다는 일본인이라고 하신다. 이 좋은 제품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라  주어서 안타까워하신다. 일본 여행 가면 일본은 여전히 나무 재질의 수저 사용이 일반화다. 여행 프로그램 방송을 보면 중화권 문화의 나라들도 나무젓가락 사용이 많다. 간혹 TV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양반들이 은수저를,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나무 수저를 사용한다. 나무는 세척에 약해서 비위생적일 거 같은 나의 편견도 있다. 사장님 말을 빌리자면, 옻칠한 수저는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옻칠을 여러 번 한터라 쉽게 벗겨지거나 변색되지 않는단다. 귀한 만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대중화를 위해 일반가정에서 사용하기 편한, 물론 가격도 친근한 수저들을 추천해 주신다. 매끄럽게 깎아진 나무에 옻으로 미끈하게 칠하여진 수저에 새삼 눈이 한 번 더 간다. 친구는 식구 수대로 한 벌씩 장만한다. 4인 가족인 친구는 각기 다른 문양의 수저를 골고루 고른다. 나는 선뜻 내키지 않아서 다음으로 미룬다. 사장님께서 선물이라며 젓가락 한 벌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다. 나까지 횡재했다.      

 생각지도 못 한 수저 구경을 하면서 문득 재미난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 1년, 서울구경을 공짜로 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이슬람 문화 캠프를 신청했다. 적당히 캠프 참여했다가 여가시간에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려 했는데, 나의 계획은 무산된다. 5일간의 합숙캠프 일정은 빠듯하고 개인 자유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지척에 이태원과 명동을 두고도 그림의 떡이다. 나를 힘들게 한 요소는 따로 있었다. 철저하게 이슬람식으로 행동하는 훈련이다. 그까짓 거 해보지 하면서 만만하게 보았다. 첫 식사시간이다. 어딜 가든 밥 먹을 때는 행복하다. 식판에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는다. ‘아참, 수저를 안 챙겼네.’ 아무리 둘러봐도 수저통이 안 보인다. 주최 측 리더가 이슬람 방식인 손으로 음식을 먹으라고 한다. 이런 낭패가 있나! 떡이나 부침개도 아닌 밥과 반찬, 국을 어찌 손으로 먹으란 말인가. 식판 앞에서 제사 지내듯이 한동안 가만히 눈치만 봤다. 하나둘씩 손으로 먹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시늉을 내며 손가락을 모아서 밥을 집는다. 양념에 버무린 반찬을 집을 때마다 손가락은 움찔한다. 식사 후 세면장에서 손톱 사이로 낀 음식물을 씻어내려고 박박 문지른다. 봉선화 꽃잎이 물든 꼴이다. 하루 세 끼 오 일간, 이 짓을 어찌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나의 근심은 다음 날로 해제되었다. 인간은 인류 생명체 중에서 적응이 제일 빠른 동물임에 틀림없다. 첫날의 당혹감은 어디로 갔는지, 다들 요령껏 음식을 담아 와서 능숙하게 밥을 먹는다. 3일 차 이후에는 중동의 현지인과 먹는 모양새가 흡사하다. 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도 손가락 2개로 깔끔하게 훑어 먹으면서 문득 손으로 먹는 편리함이 몸에 베임을 감지한다. 학창 시절 도시락을 꺼냈을 때, 엄마가 깜빡하고 수저통을 빠트린 적이 몇 번 있다. 지금처럼 일회용 나무젓가락이 흔치도 않았다. 친구들에게 빌릴 엄두도 못 내고 생짜배기로 굶고 나서 엄마한테 1절, 2절, 후렴구까지 투덜거렸다. 캠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무의식 중에 내가 손으로 반찬을 자연스레 먹었다. 나를 쳐다보는 가족들의 놀란 모습이 또렷하다.     

 집으로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공방 사장님이 주신 나무젓가락에 눈이 간다. 나무 향이 은은하고 촉감도 따스하다. 차디찬 스테인리스 젓가락과는 대적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가족 수대로 각각 수저를 고르는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밥공기나 그릇에는 신경을 썼지만, 쉴 새 없이 입안을 들락날락하는 수저에 대해선 무신경했다. 신혼 때 시어머니께서 은수저 한 쌍을 주셨다. 어머니의 깊은 뜻을 모른 체, 사용하기가 무겁고 색이 바라져 구석으로 내밀리다가 아파트 장터에 ‘은삽니다’ 장사치가 와서 팔아버렸다. 사용과 세척의 편리함에 이끌리어 통일된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했다. 부동산에 명의를 넣기 위해선 비싼 세금까지 부어 가면서 나의 이름, 나의 소유를 고집하면서 정작 나의 수저는 없다. 별거 아닌 사소한 부분을 놓치고 살았다. 이건 누구 수저, 저건 누구 수저 챙기는 수고가 뭣이라고 말이다. 수일 내에 다시 남포동에 가야겠다. 그 수저로 밥을 먹으면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밥맛도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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