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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Mar 30. 2022

할머니 카페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지난해 약속한 대로 올해에도 제주도를 찾았다. 이번에는 주어진 시간이 넉넉해서 여유롭게 천천히 다녀보리라 맘을 먹었다. 편리한 렌터카 서비스를 마다하고 다소 불편할 수도 있지만 대중교통과 뚜벅이를 자처했다. 유창한 느림의 미학을 운운하기보다는 그냥 걸어보고 싶었다. 설렘을 가득 안고 나는 발을 내디뎠다.     

 겨울의 시작인 12월, 제주는 감귤이 풍성했다. 노란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 눈길 가는데 마다 귤이 주렁주렁 하다못해 흐드러지게 핀 꽃 같았다. 한 달가량 머물면서 질리도록 귤만 먹었다. 도시인들의 입맛 취향에 따라 품종개량으로 하우스 귤들은 대접을 받는데 노지 감귤은 미운 오리 신세였다. 수확량은 넘쳐나는데 일꾼 부족으로 버려지는 귤이 산더미였다. 길가에 떨어진 귤을 먹다 보니 제 값 주고 귤을 사 먹어보지 못했다. 농부들에게 미안해진다. 다음에는 하루의 일꾼이라도 되어드려야겠다.     

 지난해 여행에서 들렀던 장소를 마치 회귀하듯 다시 돌아다녀봤다. 인기 드라마의 다시 보기 마냥 재미가 쏠쏠했다. 발길을 재촉하며 그 카페에 가보았다. 휴무 팻말이 걸린 채 문이 굳게 닫혀있다. 아쉬우면서도 주인장이신 할머니의 근황이 걱정되었다. 수일 내에 다시 오리라 맘먹고 발길을 돌렸다.      

 제주도에는 삼다가 있다. 다시 말해 세 가지가 많다는 거다. 예전에는 바람, 돌, 여자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어 삼다 리스트도 새롭게 탄생했다. 편의점, 게스트하우스, 카페가 지금의 제주도 삼다이다. 육지의 커다란 프랜차이즈와는 달리 제주도에는 아담한 개인 커피점이 많다. 관광객들이 밥보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지 정말 많았다.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브런치 카페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년 이맘때, 숙소 근처에서 산보를 하다가 우연히 방문한 현 카페, 우린 할머니 카페라고 부른다. 색다른 인테리어도 아닌 그냥 점포 앞마당에 화초가 많은 시골 다방 같은 외관에 별 기대 안 하고 목이나 추이 자고 들렸다. 실내 인테리어는 단순했다. 빛바랜 책이 몇 권 꽂혀있고 동남아 여행지에서나 볼 만한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눈길을 끄는 건 세월의 흔적을 알 수 없는 커다란 LP 축음기였다. 카페 안의 흐르는 음악이 거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치 축음기의 소리를 듣는 착각에 빠졌다. 주문받는 이의 모습에 한 번 더 의아했다. 마스크를 썼지만 나이 많으신 어르신임에 분명했다.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뿐이어서 자연스레 주인장과 대화를 이어갔다. 여든 살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해서 여든한 살에 창업을 하신 열정적인 분이셨다. 종업원도 없이 혼자서 카페를 운영하셨다. 원두커피 맛도 일품이었고 가격도 제주도 물가에 비해 알뜰했다. 환하게 웃으시며 정감 하게 이야기를 받아주셔서 우리는 어느새 낯선 이방인임을 잊고 아주 편히 차 한 잔 마시고 길을 나섰다. 내년 여행에 다시 들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보다도 우리의 발길이 그곳을 향했다.      

 첫 번째 방문을 허탕 치고 며칠이 지나 오름으로 향하던 중에 불이 켜져 있는 카페를 발견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주인이 바뀌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뒤로하고 할머니 바리스타는 원두를 내리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히 소일 삼아 가계를 운영하고 계셨다. 작년보다 오히려 젊어지신 거 같았다. 비법이 뭐냐고 물으니 적당한 일거리가 있어 움직이다 보니 안 늙는 거 같다며 웃으셨다. 잊지 않고 찾아준 여행객이 고마웠는지 할머니는 소반에 귤을 담아내어 주셨다. 제주도는 이 맘 때가 한창 귤 수확기라서 어딜 가든 귤이 넉넉하다. 식당이든 상점이든, 심지어 편의점 앞에도 귤을 한 상자씩 서비스로 내어놓고 오고 가는 여행객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팍팍한 도시 인심에 찌든 우리에게는 공짜로 맘껏 먹을 수 있는 귤이 생소하면서도 여간 반가울 수 없다. 특히나 겨울 도보여행에서 갈증해소에 귤이 딱 이었다. 자리를 뜨며 인사하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귤 한 봉지를 담아주셨다. 즐거운 여행과 다음의 만남을 소원하며 우린 따스한 가슴과 한 아름의 묵직한 귤 봉지를 안고 나섰다. 할머니 바리스타의 모습에서 유년시절 시골의 외할머니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내년에 다시 제주도에 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생겼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행의 패턴도 변한다. 예전에는 발 도장 찍듯이 유명 명소만 찾아다녔다. 남들 다 가본 곳이기에 꼭 가야만 한다고 여겼다. 누굴 위한 여행인지도 모른 체 달렸다. 이번 여행은 오롯이 나를 위해 즐겨보리라 맘을 먹었다. 눈치 보지 않고 나의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걷다가 쉬고 싶으면 쉬었다. 걷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명소를 발견하고 눈여겨보았다. 가끔 길을 헤매기도 한다. 초반에는 두려웠지만 차츰 배짱도 생겼다. 돌고 돌다 보면 길은 어디에든 있었다. 수많은 갈림길을 만났고 선택의 순간도 뒤따랐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탁 치면 가야 할 길을 점지해 줄까 묻고 싶었다. 휴대폰 앱의 내비게이션 덕택에 길을 잃을 경우는 드물지만 낯선 길에서 나는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떨림을 가진다.     

 나이에 5자를 달고, 신 중년이라는 명사가 붙은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주춤하거나 결정을 못 하기도 한다. 누가 정답을 알려주면 참 좋으련만. 80년 인생을 사신 현 카페 사장님은 정답을 아실까 궁금하다. 서두르지 않고 한 발짝 천천히 걷는 여유를 배우고 싶다.     

 제주도 도보여행에서 양말이 무려 세 켤레나 구멍이 났다. 어느 프로그램의 멘트가 떠오른다. 먹은 자 만이 맛을 안다고 했다. 공감한다. 걸어 본 자 만이 그 길의 소중함을 알고 가본 자 만이 또다시 가는 거 같다. 나는 내년도 제주도 기행을 벌써 그려본다. 분명 길은 나를 반겨줄 것이고 나의 질문에 언젠가는 답을 줄 것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걷는다.      

 고소한 커피 향기가 스며든다. 함께 먹었던 귤도 침샘을 자극한다. 다시금 할머니 사장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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