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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May 03. 2022

아버지의 기억 저편에

아빠, 사랑해요

 이른 시간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마디가 “우임아, 아빠가 좀 이상하다.” 엄마의 뜬금없는 말에 놀랐다. 아버지가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는 거다. 집안의 친척 중에 생존해 계시는데도 몇 년 전에 사망하셨다고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셨단다. “일시적인 착각을 하셨겠지.” 하며 나는 아무 일도 아닌 듯 대답했다. 엄마 말을 빌자면 처음이 아니고 두세 번 비슷한 증상을 보였단다. ‘설마, 우리 아버지가?’ 하면서 나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인터넷을 폭풍 검색하여 치매검사 전문병원을 예약했다.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멀쩡한데 굳이 검사받을 필요 없다고 완강하셨다. 건강검진처럼 80세를 바라보면 예방차원에서 사전검사하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편하게 말씀을 드렸다. 큰 딸의 설득에 아버지는 병원을 따라 나셨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지루한 검사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의 얼굴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검사실 밖으로 흘려 나오는 소리를 통해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짐작이 되었다. “내가 경로당에서 고스톱 치면 만년 일등이다. 어린아이 산수 문제를 물어보는 것이 무슨 검사냐?” 무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 점수 백점 나오겠네요.” 최대한 아버지 기분 맞춰 드리려고 노력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고 지루했다. 젊은 우리보다 총기가 좋으시고 기억력도 뛰어나셨던 아버지는 세월 앞에서 그 빛을 잃으셨다. 늘 자신만만하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을 따라가셨다. 우리 아버지만은 특별할 거라고 자만해서일까? 아버지랑 나란히 대기실에 앉아 있자니 어색했다. 결과는 다행히도 치매는 아니고, 단지 노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로 나왔다. 우려했던 결과가 아니어서 비싼 검사료가 아깝지 않았다. 아버지의 표정도 밝아지셨다.     

 병원비 계산을 마치고 주차 증을 받으려고 하자, 간호사가 “차번호가 몇 번이죠?” 물었다. 아뿔싸! 갑자기 나의 차 번호판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긴장하니까 더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 치매검사받으러 온 보호자인 내가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당황해하는 나를 간호사가 빤히 쳐다봤다. 아버지가 뒤에서 말씀하셨다. “2070 이잖아.” 아버지는 큰 딸이 몰고 다니는 똥차의 번호를 당당히 기억하셨다.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치매검사를 했어야 했나 보다. 병원을 나와 점심을 했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으셔서 기분이 좋으신지 맛나게 드셨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계셨다. 단축키나 연락처 저장으로 나는 전번을 거의 외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아버지가 나보다 훨씬 나았다. 시간의 흐름과 노화를 인력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아버지의 기억도 차츰 흐려질 것이다. 오늘 큰 딸의 자동차 번호를 생각해내듯이, 아버지는 끝까지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기억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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