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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Jun 24. 2022

이름이 갖는 의미

이름에 걸맞게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

 어느 날 문득 폰 연락처에서 낯선 이름이 뜬다. 사진을 보니 분명 대학동창인데 이름이 다르다. 궁금해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희 맞지? 지연으로 이름이 뜨네?”

“나 사실은 얼마 전에 개명했어.”      

 친구의 말인즉, 점쟁이가 이름을 개명해야 미래의 사주팔자가 술술 풀린다고 했단다. 요즘은 이름 바꾸는 절차도 간단해서 많이들 한다. 친구는 바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당부했다. 친구의 부탁과는 달리 나의 입에서는 불쑥 ‘영희야’가 튀어나온다. 친구는 “이제 영희 아니라니까. 지연이라고 불러.”

“앗 미안, 또 깜빡했네.” 삼십 년 가까이 입에 붙은 이름이 무의식 중에 나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지연이로 불리어야만 나의 노년이 무탈하다고 하니까 신경 좀 써주라.” 정색하며 부탁하는 친구의 태도에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나는 지연이보다 영희가 친근감 있고 좋았지만 친구의 간곡한 바람에, 툭 튀어나오려는 옛 이름을 한 템포 부여잡고 개명한 이름을 불러준다. 십여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삼순이처럼, 최근에는 다양한 이유로 개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뼈를 깎는 성형수술로 얼굴도 바꾸는 세상인데 이름 바꾸는 게 뭔 대수냐 싶다. 더구나 이름은 본인의 의지대로 붙여진 것도 아니요, 평생을 따라다니는 건데 이왕이면 불리어지고 싶은 이름을 갖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 존재하는 대부분의 만물에 이름이 있다. 스마트폰 앱의 발달로 길을 걷다 발견한 야생화에 폰 카메라를 갖다 대면 명확하게 이름을 알려준다. 폰 카메라를 나의 얼굴 정면에 들이밀면 나의 이름을 불러 줄려나? 아버지는 나의 이름을 철학관에 가서 지으셨다. 그 시절 딸들의 이름은 그냥 집에서 편하게 짓곤 했는데, 첫 딸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특별하게 짓고 싶으셨다.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이 나의 이름 한자를 보시더니 귀한 뜻을 가진 이름이니 이름값 하라고 하셨다. 내 이름은 도울 우, 맡길 임, 우임이다. 이름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인지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언어의 양면성에 따라 좋게 말하면 타인을 배려하고 챙겨준다는 반면에, 시시콜콜 지나치게 관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 오지랖 있는 사람이 도리어 상처받기도 한다.     

 해가 바뀌거나, 명절마다 나는 안부인사 메시지를 보낸다. 개개인 모두 각자에게 손 편지 쓰듯 살뜰하게 안부를 물었다. 단체 문자의 일괄된 캡처나 복사해서 붙이기는 얼핏 성의가 부족한듯하여 피했다. 무얼 바란 것도 아니요, 순전히 내 맘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가끔 예상 못한 일에 휘말리어 나의 오지랖 성격이 몰매를 맞기도 한다. 사람 마음이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수없이 되새기면서 인생을 배우기도 했다. 선의의 행동이 악의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히는 경험을 몇 번 당하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오지랖의 날개를 싹둑 잘라 버리리라 결심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 습관화되어버린, 내가 늘 먼저 하는 톡 안부 인사를 멈췄다. 올 새해에도 간지러운 손가락을 꼭 잡고 인사 문자를 참아봤다. 실망스럽게도 내 휴대폰 알림은 조용했다. 열심히 안부를 묻던 내가 조용하면 지인들의 연락이 발발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마치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맥이 빠진다. 서운하면서 괘심도 했다. 나만 여태까지 짝사랑하듯 일방적이었구나.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에 안부 문자를 몇 통 받긴 했다. 나답지 않게 너무 조용해서 무슨 일 있냐면서 물어왔다.     

 

 나다운 게 무엇일까?     


 이름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매사에 쪼금 내가 손해 보면서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태생적으로 갈등을 싫어하는지라 그로 인한 스트레스보다는 쉬운 쪽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시점에서 나는 의문을 가져본다. 손해를 본다고 느끼는 건 1인칭 나 자신뿐이다. 나의 오만함이다.      

 그전처럼 시도 때도 없이 톡 사냥을 않는다. 갑자기 변하려니 심심도 하다. 하루아침에 나의 오지랖 성향이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몇 달 전 일을 시작한 지인이 블로그 꾸미기에 관해 도움을 요청했다. 여러 자료를 검색해서 보내줬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얽히고설키며 돌아간다.   

   

 나의 이름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비싼 작명 비용을 지불한 만큼 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나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지는 못 하더라도, 이름에 걸맞게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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