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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Aug 20. 2022

밥사

9회 말 안타를 치고 싶다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예능 교양방송에서 갑과 을에 대한 주제를 다루어서 흥미롭게 시청했다. 참석한 패널들의 이야기 주머니가 쏟아졌다. 한 방송인이 툭 던진 말이 사이다 발언이다.

“석사, 박사보다 더 높은 것이 밥사야. 밥 사 주는 사람이 진정한 갑이야.”

또 다른 참가자가 “내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해. 밥 값 내려고.”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야생동물이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자주 본다. 우리 인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군중의 무리에서 상위를 차지하기 위해 밥값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 조직에서 승승장구 승진의 동아줄을 잡고 올라 가야만이 갑의 기분이라도 맛보았으려나. 월급 받는 직장에서 평탄한 길을 간 나는 항상 을이었다. 결혼 이후 시댁에서도 며느리라는 직책으로 을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을로 살아온 셈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나도 갑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다. 한일 월드컵 대회가 끝날 즈음 동생과 함께 프랜차이즈 우동 전문점을 운영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었다. 직원 관리가 정말 힘들었다. 주방에서는 주방장과 찬모가 손이 안 맞아 티걱했고 배달사원들은 책임감 없이 무단결근이 잦았다. 직원들 월급 주다 보면 한 달이 금방이었다.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진다 라는 말처럼 웬만히 수익이 나더라도 지출 또한 상당했다. 가계 운영에 신경은 또 얼마나 쓰였던지. 맘 편한 월급쟁이가 낫다 싶어 3년 정도 하다가 정리했다. 지질한 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인들이 “돈은 좀 벌었니?” 묻곤 했다. 나는 한결같이 “고생과 인생을 벌었어.” 대답했다. 그것도 경험이라고 코로나와 수해현장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한숨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남의 밑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을 때에는 몰랐던 것을 자영업이랍시고 해보니 오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쉬운 예로 명절이다. 직원은 명절 보너스, 선물, 휴가를 받지만 관리자는 명절이 속해 있는 달은 적자이다. 영업 일수는 줄고, 지출은 많은 달이다. 내가 호텔 근무할 때에 명절을 비롯하여 노동자의 날에는 상당한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도 고마워하는 마음은 없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거라고 오만했다. 오히려 더 주지 않나 하면서 불평했다. 식당을 정리한 후로 나는 다시 여러 직장을 다녔고, 명절에 식용유 한 병이라도 감사히 받았다.   

   

 친구들과의 모임 또는 지인과의 만남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더치페이가 만연하나, 낀세대인 우리는 머릿수 계산이 아직 서툴다.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돌아가면서 부담하거나 특별한 날에는 기분 좋게 한 턱 쏜다. 대접을 받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부담이 없어야 관계가 유지된다. 밥을 잘 사는 사람이 진정한 갑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사람이 몇몇 있기도 하다. 그중 한 분에게 물어봤다. 

“본인이 갑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세, 갑보다는 호구 아닌가?” 하시며 웃으신다.     


 부모님이 나가시는 경로당에도 갑이 존재했다. 자식들 자랑, 손주 자랑 등등 얼마나 하고픈 말씀들이 많을까. 소실 적에 잘 나가시던 분들도 입이 간질 하다. 진정한 갑은 잘 나가는 자식을 둔 사람도 아니요, 재산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경로당에서 지갑을 잘 여는 사람이 갑이다. 잘 난 자식과 재산이 많아도 지갑을 열지 않으면 어르신들 눈에는 아무 쓸모 짝에 없는 거란다. 경로당에 매일 출근하시는 분들은 용돈이 제법 필요할 것이다. 노후준비에 경로당 용돈도 찜해두어야겠다.  

   

 드라마를 보면 명절 내내 일 많이 한 며느리보다 돈 봉투 두둑이 챙겨주는 며느리가 대접받는다. 며느리라는 동지의 을속에서 또 다른 갑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전업주부의 위상이 올랐다고는 하나 여전히 맞벌이 주부의 기여도를 높게 매기는 게 현실이다. 한 티브이 방송에서 여성들의 나이 별로 갑을 정의했다. 30대 여성은 능력 있는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게 갑이라고 한다. 50대 여성은 자녀들이 명문대 입학하는 것이다. 70대 여성은 남편이 많은 재산을 남기고 간 경우란다. 갑은 곧 돈과 땔 수 없는 웃픈 현실이다.    

 

 이리저리 돌려봐도 내가 갑이 될 확률은 낮다. 운명처럼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얄밉지 않은 을로 살다가 경로당 갈 나이가 되어서는 눈치 안 받는 갑이 되고 싶다. 9회 말 안타를 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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