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이체처럼 머리카락이 알아서 스스로 염색이 되면 참 좋겠다
탁상달력을 넘기다 보면 한 달이 참 빠르구나 싶다. 딱히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이지만 달력에 잔잔하게 메모하다 보면 나름 알차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또 한 장의 달력을 정리하며 다음 장을 펼친다.
돌아서면 깜빡하고 잊어버리는 나이에 가까워서인지 머릿속에 기억하기보다는 메모하는 습관이 편리해지고 있다. 수첩에 적고 다시 한번 체크해도 간혹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40대 중반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 마녀의 형상이다. 탈모와 머릿결의 손상 걱정에 염색을 미루고 싶어도 어김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하얀 미운 새싹이 올라온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시선이 그리로 향하고 귀차니즘이 밀려온다. 치과 가기 싫은 거와 같이 염색하는 작업도 은근히 스트레스다. 광고 카피처럼 풍성한 모발을 유행에 따라 칼라 선택해 가면서 염색하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샴푸 할 때마다 쑥쑥 빠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귀하다.
어느 사장님이 “직원들 월급을 주고 돌아서면 금세 월급날이 다가온다.”라고 하신 말처럼 이 놈의 흰머리는 까먹지도 않고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삐져나온다. 굳이 달력에 메모할 성가신 작업도 필요치 않다. 어느 여성 장관은 흰머리로도 세련되게 스타일링하던데 나에게는 아직 그런 센스가 부족하다.
매번 미용실에 가는 것도 비용면에서 부담이 되어 셀프 염색을 자주 한다. 조심한다고 해도 욕실의 벽에 염색약이 튀기도 해서, 욕실 대청소까지 해야 한다. 다른 주부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유독 욕실 청소가 버겁다. 수고로움을 뒤로하고 샴푸 후 감쪽같이 감춰진 흰머리의 흔적을 보면 개운하다. 마치 처음부터 검은색 머리의 소유자 마냥 기분도 업이 된다. 유효기간이 한 달이라서 아쉽다. 자동이체처럼 머리카락이 알아서 스스로 염색이 되면 참 좋겠다.
학창 시절 사진 한 장을 꺼내본다. 바지르한 까만 생머리가 어깨에 닿아 찰랑인다. 촌티가 난다고 느꼈었던 그 시절의 모습이, 유독 오늘은 그리워진다. 20~30년 후에는 윤기 없는 푸석한, 매달 염색해야 하는 지금의 머리카락을 또 부러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