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에는 이것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점심 무렵에 K가 번개팅 하자며 연락을 보냈다. 작년 연말에 일터에서 계약이 종료되어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나름 바쁘게 지내는 친구다. 갑자기 뭔 바람인가 했더니, 새 직장을 얻었다며 상기된 목소리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K의 성화에 길을 나셨다.
“나 비행기 탄다.” 뜬금없는 K의 말에
“연초부터 해외여행이라도 가니?” 물으니
“ 비행기 안에서 일하게 되었다.”
“ 뭔 소리래?”
의아해하는 나의 표정에 K는 폭소를 터트렸다.
K는 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승무원 양성 학원을 꼬박 1년간 다녔다. 하늘에 떠다니는 웬만한 비행기의 항공사에는 거의 지원을 했다. 아슬하게 합격문 앞까지 가서 고배를 마셨다. 결국 K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짐을 싸서 부산에 내려왔다. 3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K는 항공기 기내청소 업무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다.
“면접관한테 내가 뭐라고 어필한 줄 아니? 20대에 못 이룬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우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승무원이 되어 고객 서비스 하는 거랑 비행기 청소하는 거랑 어쨌든 비행기를 타는 건 똑같다. 비행기 안에 승객이 있고 없고 차이일 뿐이다.
생계를 위해, 자아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직업을 선택하고 일을 한다. 적성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주어진 일자리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수명이 길어져서 경제활동 할 수 있는 시간도 늘었는데 상대적으로 일자리는 녹녹지 않다. 눈높이를 낮추면 사방에 일자리가 널렸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들 녀석이 취업이라는 걸 했다. 학창 시절에 알바는 했지만 어쨌든 학과 전공을 살려 사회생활에 발을 디뎠다. 기술직이다 보니 지금은 선임들 옆에서 보조를 하면서 발바닥 땀나게 쫓아다닌다. 주 5일 학교 수업만 하다가 생애 첫 직장에서 주 6일 근무를 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시간의 부족함도 느끼리라. 이제 어엿한 성인인 아들도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조용히 응원만 할 뿐이다.
K는 3일간의 교육 후에 현장으로 투입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안 해 봤던 일을 하려면 약간의 두려움과 걱정이 동반되는데 K는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한층 업된 모습이다. 오히려 K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부러움에 가까웠다. 뭐가 부러웠냐고? 직업의 귀천에 개의치 않고 노동의 가치에 의미를 두면서 새 일터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 나이에는 이것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점심과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한 달여 뒤에 다시 보기로 했다. K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근무 에피소드를 맛깔나게 늘어놓겠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하늘은 맑다. 우리의 내일의 일기장도 맑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