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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Feb 15. 2022

사막의 초대장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뉴스에 국제유가가 연일 상승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자동차 기름 값에 대한 부담감과 동시에 중동의 어느 한 나라가 나의 뇌리에 떠오른다. 10여 년 전에도 원유 가격은 폭등했고 중동의 산유국들은 제2의 봄을 맞이했었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소 사업을 해외에 수출했고, 외국의 교육생들이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나는 몇 년간 외국인 기술교육생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했었다. 내가 맡은 학생들은 주로 두바이가 속한 아랍에미레이트 출신들이었다. 땅만 파면 석유가 콸콸 나오는 부자 산유국이다. 국민 총소득도 월등하게 높고 요람에서 무덤 까지라는 표현은 이제는 이 나라 국민에게 해당되었다.     

 첫 해 교육생은 다수의 남학생 무리 속에 여학생이 몇 명 있었다. 아랍의 정서상 여학생을 외국으로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본국에서도 특별 관리를 부탁한 터라 나도 신경이 쓰였다. 낯선 한국의 다른 문화 속에서 학생들은 여러모로 힘들어했다. 업무를 떠나서 나는 가족 같은 맘으로 따뜻하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한국에서의 생활과 기술교육연수를 무사히 수료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아랍권 문화수업 자료를 만들던 나에게 졸업을 하는 여학생들이 본인 고향집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휴가를 얻어 그 이듬해에 아랍행 비행기를 탔다. 해외 여러 나라를 가봤지만 아라비아반도는 처음인지라 나도 설레었다. 열흘간 학생들의 집을 옮겨 다니면서 그들의 생활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마침 르 바단 이라는 명절 기간이었다. 가는 곳마다 나를 너무 환대해 주었다. ‘르 바단’ 기간에 동쪽에서 온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복이 함께 온다는 풍습이 있었다. 나는 동방의 행운 메시아가 된 격이었다.      

 한국에서 온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었다. 외국을 나가면 자연스레 애국심이 생긴다더니,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감사했다. 우리네와는 달리 대가족이 일반화되어서 3~4대가 한 집안에서 같이 살았다. 자녀 출산은 보통 대 여섯 명 이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 집에 기거하는 가족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나라에서 모든 걸 지원해주다 보니 이 나라 국민들은 풍요로움을 맘껏 누렸다. 석유가 자원으로써 활용되지 못하고 단지 검은 물로 취급되던 시대에는 이들도 궁핍했었다. 칠십 세의 할머니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젊은 날의 시절을 늘어놓으셨다. 가정마다 집안의 어르신을 공경하고 위계질서가 대단했다. 전원일기 드라마를 보는 거 같았다. 핵가족이고 일 년에 가족이 모이는 횟수도 점점 줄어드는 우리는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자 손녀 간에도 손님같이 어색함이 있을 때가 있다.      

 이 여행의 목표는 단순 여행이 아니라 아랍문화를 체험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거였다. 손님처럼 대하지 말고 가족처럼 편하게 나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체류하는 동안 나는 그들처럼 입고 먹고 똑같이 생활했다. 히잡을 두른 나는 대가족 속에 파묻혀 그들의 가족이 되어갔다. 내가 여느 여행처럼 호텔에 머무르면서 관광지나 돌아다녔더라면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꽤 많다. 수박 겉핥기 마냥 낯선 나라를 내 방식대로 해석해 버렸을 것이다. 아랍여행은 달랐다. 석유로 인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신흥 부자에 대한 배 아픔의 편견이 사라졌다. 물론 좋은 것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 나라가 안고 있는 사회의 그늘도 보았다.     

 여행의 막바지에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일주일 넘게 현지 음식만 먹었더니 위가 뒤틀렸는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할머니께서 죽을 끓여 오셨다. 주방에서 일하는 식모가 있는데도 본인이 직접 만드셨다. 할머니는 수시로 괜찮으냐고 물으셨다.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오래된 앨범을 들고 나와 보여주셨다. 빛바랜 사진들이 있었다. 대부분 남자 가족사진들이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아랍에서는 여자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하셨다. “할머니 젊으셨을 때 미인이셨죠?” 했더니 발그레 웃으시며 할아버지랑 사이에서 열네 명의 자녀를 출산했다고 자랑하셨다. 할머니의 죽을 먹은 탓인지 나의 컨디션은 회복되어 여행을 마무리 지었고 한국으로 오기 위해 짐을 꾸렸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할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셔서 뭔가를 내놓으셨다. 절임 대추열매였다. 아랍 고유의 전통 간식이었다. 할머니가 작년에 손수 담은 거란다. 우리네 된장 같은 발효음식이다. 가족들은 냄새나고 포장용 기도 허술해서 공항 검색대에 걸린다면서  할머니를 말렸다. 할머니는 본인이 직접 만든 대추열매 간식을 나에게 주고 싶어 하셨다. 기꺼이 감사히 받았다. 종이로 겹겹이 포장해서 케리어 깊숙이 넣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나는 할머니에게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우린 귀한 사진을 한 컷 찍었다. 다리가 아파서 멀리까지 배웅을 못하신다며 현관에서 나를 꼭 껴안아주셨다. 아랍어로 주문처럼 한참을 뭐라고 하셨다. 나에게 늘 신의 은총이 함께 하라는 뜻의 아랍인사라고 가족들이 통역해주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해서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했다. 아랍 할머니의 대추열매를 오랫동안 먹었다.     

 그 당시 스무 살이던 아랍 학생들은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 뒤로 가끔씩 소식을 보내고 주고 하다가 시나브로 끊겨버렸다. 이방이었던 나를 온전히 가족처럼 대해 준 그들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기회가 되면 다시 가고픈 곳이다. 일가친척이 내 집을 방문해도 불편해하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짧고도 긴 아랍여행에서 그들의 따스한 가족 같은 배려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의 달달한 절인 대추열매를 떠올리니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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