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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Feb 15. 2022

지리산 둘레길

길이란 가다 보면 끝이 있고, 그 끝에 해답이 있다

 점심을 먹고 차 한 잔 마신다. 사무실 창밖의 울창한 나무들에 시선이 꽂힌다.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힘을 잃고 시나브로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려는지 아침저녁으로 공기 냄새부터 다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간에 딱딱 맞춰 제 할 일 하는 자연의 근면성에 박수를 보낸다. 오후 업무 시작하려는데 친구의 전화가 왔다. 생뚱맞게 지리산에 가자고 한다. 땀 삐질 흘려가며 숨 헐떡이고 올라갔다 도로 내려오는 건 나의 체질이 아니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평소와 다르게 집요하게 조르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배낭을 쌌다.     

 제주도 올레길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았다. 둘레길은 스무 두 개의 구간으로 나눠졌는데 우린 짧고 제일 쉬운 아홉 번째 구간을 택했다. 9구간의 코스는 산청 덕산마을에서 하동 위태 마을까지다. 등산복이나 장비도 없이 그냥 편한 아줌마 복장에 운동화와 모자만 걸쳤다. 숙소에서 나와 구간 출발 지점에 닿으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5일장이 섰다. 시골장터에서 눈요기와 배를 채우니 역시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이 가벼웠다. 일반 등산과 달리 둘레길 코스는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게 아니다. 차 도로를 따라 거닐다가 마을로 들어가고, 논밭을 가로질러 하천이나 계곡에서 발도 담그고, 야트막한 산 능선도 오른다. 마을을 통과할 때마다 ‘주민들이 생활하는 주거지이니 말소리를 줄여주세요.’ 또는 ‘농작물은 주민의 재산입니다.’ 깜찍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말소리는 줄이고 농작물은 눈으로만 즐겨야겠다.      

 국립공원의 산으로만 자유로이 놀러 다니다가, 마을 주민들의 눈치가 처음에는 다소 불편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밭에서 일하시는 어른들에게 물어물어 무사히 다음 코스로 넘어갔다. 도보 여행자에게 온전히 공간을 내어준 그분들에게 고마움과 그들의 터전을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땡볕 아래 들녘에서 흘린 땀을 숲길의 나무들이 식혀주고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방전된 에너지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충전이 된다. 둘레 길의 매력이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늦은 오후에 코스의 종착점에 닿았다. 지도상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숙소로 가려고 우선 읍내로 향하는 시골마을버스를 탔다. 버스 안내양이 있었다. 승객 대부분이 나이 많으신 노인이다 보니 안전 승하차를 위해 지자체 군에서 지원했다. 어르신들 짐도 들어주고 안부도 묻고, 군것질도 나눠먹는 모습이 정겹다.     

 하동의 어느 자그마한 읍내에 도착한 우리는 허기가 져서 식당을 찾았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저녁을 향하는 시간인지라 배에서 소리가 요란했다. 도시와는 달리 식당이 별로 없었다. 그 흔한 편의점도 없다. 길모퉁이에 중국집이 있어 무작정 들어갔다. 허름한 실내 인테리어에 반신반의하면서 제일 만만한 메뉴인 짜장면을 주문한다. 짜장면 한 젓가락이 입속으로 들어온 순간 우린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맛나다. 게 눈 감추듯 폭풍 흡입했다. 허기질 때 먹는 건 다 맛나고, 배고플 때 간 식당이 맛  집이다라고 우리 식으로 정의를 내렸다. 

 하동군에서 산청군으로 넘어가는 버스는 3시간 뒤에 도착한다고 한다.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좀 더 걸어서 다음 버스정류장에서 직행버스를 타는 쪽으로 선택한 나와 친구는 걸음을 재촉했다. 배도 부르고 평평한 길을 따라 걸으니 마냥 쉬워 보였다. 걷다 보면 정류장이 나오겠지 하면서 도란도란 수다 떠느라 우리는 곧 닥칠 위기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떨어졌고 한 참을 걸어도 정류장은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인적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친구의 발에 물집이 생겨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위치를 검색해도 연결이 안 되었다. 버스는 고사하고 택시도 안 보인다. 친구는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주저앉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나는 지나가는 차를 세우기 위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달리는 차는 내 앞에서 더 속력을 내며 지나쳐버렸다. “시골 인심 야박하네. 치마라도 입고 서 있어야 하나?” 서부영화 코스프레하냐고 친구가 배꼽 잡고 웃는다. 몇 대의 차가 지나간 후, 나는 필살기로 양손을 휘두르며 구조신호를 보냈다. 남자가 운전하는 봉고 한 대가 멈췄다. 순간 걱정이 앞섰다. 이 차 타고 어디 섬으로 팔려 가면 어쩌지? 다행히 차 뒷좌석에 일터에서 귀가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있었다. 우리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시고 근처 정류장에 내려주셨다. 요즘은 함부로 길가에 서있는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으로 사건사고가 빈번하단다. 그것도 모르고 지나친 차를 향해 인정 없고 야속하다고 투정한 나를 반성한다.      

 해는 이미 지고 컴컴해서야 숙소에 겨우 도착한 우리는 술을 한 잔 했다. 친구가 갑자기 울었다. “너 왜 그래? 발바닥 물집이 많이 아프니. 오늘 트레킹이 그렇게 힘들었니?” 친구는 사실 최근 몇 년간 여러 가지 일들로 무척 힘들었다.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싶단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걸으면서 생각했고, 내가 히치하이커 한답시고 동분서주할 때 본인은 길바닥에 앉아 표시 안 나게 울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보지 못했기에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고,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살아 본 뒤에 결론을 내리라 결심한 모양이다. 친구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담에 둘레길 또 오자. 캉캉 레이스 치마 준비할게. 차 세우기엔 그게 딱이지.” 지리산 산자락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밝고 둥근달은 우리 술잔에 고스란히 담겼다. 친구가 마신 그날 밤의 술이 달의 정기를 품었는지, 친구는 남편과의 사이가 회복되어 잉꼬부부처럼 잘 지낸다.      

 길이란 가다 보면 끝이 있고, 그 끝에 해답이 있는 거 같다. 가보지 않은 길에 두려움이 가장 큰 적이다. 나도 매일 나의 길 위에서 나를 보고 나를 찾는다. 그 길이 때론 나를 고달프게 한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멈추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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