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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Feb 15. 2022

웃음 한 숟가락

주인이 비워 둔 의자만이 덩그러니

전쟁이 났다. 삼사 개월 안에 진정될 줄 알았던 코로나는 끝없는 평행선을 달린다. 집합 금지 시책과 방역조치에 따라 도서관, 공공장소, 헬스장, 목욕탕이 문을 닫고 열기를 반복한다. 출입하는 장소마다 QR 코드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에 서툴다. 학교 수업도 대면,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혼란스럽다. 엄마들은 집에서 뒹구는 아이들과 홍역을 치렀다. 남편들마저 재택근무랍시고 거실을 차지했다. 삼시 세끼에다가 간식까지 바친다고 XX 염색체들은 생애 큰 위기를 마주했다.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우울증으로 집을 나간다는 웃지 못할 개그가 나왔다. 전업주부 못지않게 워킹 맘들은 더 힘들다. 집에 갇혀있는 애들의 점심을 신속하게 조달하기 위해 배달 앱을 빛의 속도로 터치했다. 골라먹는 재미가 아닌, 무얼 주문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일종의 고문에 가까웠다. 코로나 시국에 어부지리로 성수기를 맞이한 배달 식당들은 점심시간 피크타임에 북새통이다. 총칼 없는 전쟁이 따로 없다.     

 늦은 결혼으로 아직 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친구들이 볼멘소리를 한다. 밥과의 전쟁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학교급식을 새삼스레 고마워하며 아쉬워했다. 일치감치 애들이 커서 학교 졸업한 나를 무한정 부러워했다. 내가 연년생인 아이들을 키우며 똥 기저귀 갈 때, 친구들은 맘껏 솔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한없이 부러워했던 그들이 이젠 나를 부러워하다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고픈 말이 있는데 뭉클함을 누르고 그냥 웃는다.     

 나는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게 일상사다. 딸아이는 고등학교 마치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졸업하고,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산다. 아들 녀석은 군 제대 후 복학을 미루고 제주도로 내려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남편은 재작년부터 직장에 교대근무를 신청하여, 집에서 밥을 먹는 횟수가 드물다. 우리 집 4인 식탁은 그렇게 주인의 자리를 하나둘씩 잃어갔다. 혼자 먹다 보니 밥 먹는 재미는 사라지고 입맛도 떨어져 끼니를 건너 띄거나 반찬에 신경이 덜 쓰여서 대충 해 먹게 되었다. 유통기한이 긴 밑반찬만 냉장고에서 들락날락했다. 사용하는 최소한의 그릇만 남겨두고 식기류를 죄다 찬장으로 옮겼다. 딸이 자주 사용하던 빌트인 오븐은 수납공간으로 바뀐 지 오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니멀 라이프로 바뀌었다.     

 딸은 가끔 전화를 한다. “엄마,  아귀찜이 먹고 싶어.” 딸이 한국을 다녀 간지도 사 년이 넘었다. 코로나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댁에서 지낸 시간이 많은 딸은 입맛이 토종이다. 유난히 한식을 좋아하는 터라 외국 타지에서 먹지 못하는 한국음식이 무척 먹고 싶은가 보다. 딸은 나의 요리 솜씨를 익히 아는 터라 엄마가 해주는 00 가 먹고 싶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 싱크대 구석 선반에서 몇 년째 자리만 차지하는 커다란 프라이팬을 끄집어내어 온갖 레시피를 동원해서 기름을 부어 지지고 볶고 싶다. 내가 가스레인지 위에서 정작 하고픈 일은 지난날의 시간을 소환해서 지지고 볶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 후 줄곧 직장생활을 했다. 육아와 살림을 병행했던 나는 지쳐갔다. 맞벌이하느라 시간에 쫓겨 산 나는 퇴근 후 제2의 일터인 집으로 향했다. 곧장 주방으로 직행하여 식구들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우렁 각시가 몰래 저녁을 준비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했었다. 며칠 째 같은 반찬이 식탁에 오른다며 아이들이 투덜댔다. “주말에 장 봐서 여러 가지 반찬 해 줄게.” 하며 넘겼다. 손재주가 없던 나는 살림에 미숙하여 애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내 손으로 해 준 기억이 많지 않다. 그 당시에는 피곤에 절어서 먹는 거 보다는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얼른 집안을 치우고 잠을 청하고 싶었다. 잘 나가는 드라마 볼 시간도 없이 살았다. 정신없는 하루의 일과였지만, 돌이켜보니 식탁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깔스러웠다. 그 시간들을 되돌리고 싶다. 그 시간들이 간절하다.     

 부모님만 연세가 드시어 우리 곁을 떠나는 게 아니다. 자녀들도 어느 시기가 되면 부모 곁에 있지 않는다. 자식이 독립할 시기가 넘었는데도 부모 품 안에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일찍 출가하는 것도 아쉬움을 남긴다. ‘애들아 조금만 기다려 줄래. 엄마가 이 일만 후딱 해놓고 맛난 거 만들어 줄게. 애들아 잠깐만 있어봐. 엄마가 청소 빨래해놓고 책 읽어 줄게.’ 이렇게 나는 미루었다. 시간이 나를 위해 정지해 줄 거라 착각했다. 아이들이 그대로 있어 줄로만 여겼다. 나의 시간보다 아이들의 시간이 더 빠르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직장에서 해방된 나는 이제 시간이 많다. 유튜브나 블로그 검색해서 얼추 흉내 내어 맛 깔 나는 요리도 만들 수 있다. ‘이거 엄마가 만든 건데 함 먹어볼래. 맛이 어때.’ 하며 물어보고 싶으나 그 음식을 먹어 줄 우리 애들이 지금 식탁에 없다.     

 제주도에 있는 아들에게 매일 안부 문자를 보낸다. ‘밥 먹었니?’ 함께 일하는 일꾼들과 잘 먹고 다니니 걱정 말라고 답장이 온다. 편식이 심했던 아들이 이제는 골고루 잘 먹는다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태어날 땐 먹성 좋던 아들이 크면서 가리는 음식이 많아서 걱정했었다. 마치 내 죄인 거 같았다. 하고픈 말도 많을 텐데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요즘 밥 못 먹고사는 사람 없다면서 아들은 나에게 인사말을 바꾸라고 타박한다. 가슴 한 편의 미안함에서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첫인사말을 달리 해봤다. ‘오늘은 뭐 먹었니?’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표현력에 웃음이 난다.     

 친구들이 가족들 끼니 준비로 고충을 쏟아낼 때, 내심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친구들은 주방에서 해방된 나를 존경까지 했지만 정작 나는 속이 아렸다. 전쟁과도 같았던 상차림 준비와 밥상머리 시간들이 눈물 나게 그립다. 아이들의 먹거리 만드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될 것이며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자라서 제 갈길 찾아간다고 친구들에게 귀띔해주고 싶었다. 후회하면 이미 늦으니 지금의 시간을 맘껏 즐기라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나에게 다시 그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즐길 것이다. 시간을 돈을 지불하고 살 수 있다면, 나는 가끔 우리 애들의 초등생 시절을 사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휴대폰에 요란한 알림 소리가 연속 울린다. 딸아이가 직접 만든 거라면서 음식 사진을 보내왔다. 샤부샤부 전골과 잡채였다. 나의 유전자를 닮지 않은 돌연변이인 딸의 음식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내가 호주 놀러 오면 손수 만들어 주겠다면서 의기양양했다. 기특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딸에게  미안했다. 딸이 해주겠다는 밥을 빨리 맛보고 싶다. 내가 맛보고 싶은 건 어쩌면 딸아이의 음식보다도 함께 밥 먹는 시간일 것이다. 식탁에 앉아 수다 떨어가면서 입 안의 밥풀이 튀어나오게 웃고 싶다.      

 오늘도 나는 혼자 식탁에 앉는다.

주인이 비워 둔 의자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애들의 웃음 한 숟가락을 그리워하며 수저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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