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어머님이 슈퍼히어로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팔 하나로는 논을 매고, 다른 팔로는 사촌 형제와 우리를 돌보던 사람.
거짓말도 단박에 간파하는 ‘형사’ 같은 사람.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님은,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님은 강하셨고 똑똑하셨고 위대하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고아(孤兒)인 아버지께 시집오셔서 3남 1녀를 낳으셨고, 큰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큰 어머님께서 재가(再嫁)하시며 고아처럼 남겨진 어린 조카 3명을 맡아 키우셔서, 우리 집은 9명(부모님, 사촌 형제 3, 우리 형제 4) 대가족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버지 밥만 별도로 밥그릇에 담으시고, 어머님 포함 8명은 큰 양푼 그릇에 담아 같이 먹었고, 가난한 형편을 벗어나고자 힘든 논농사, 밭농사 등 억척스럽게 일을 하셨습니다. 몸이 힘드신 것을 잊고자 일을 하시면서 술도 많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이 끝날 즈음이면 술 취하신 어머님을 모시러 우리 집 리어카가 많이 출동하였습니다. 그렇게 일하셔서 집과 논을 장만하셨습니다.
또 얼마나 똑똑하셨는지 젊은 시절, 어머님의 별명은 ‘차 형사’였습니다.
차 씨 성을 가진 어머님은 마을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고, 동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머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 예리한 눈썰미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님 앞에서는 늘 들통이 났고, 결국 거짓말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지금까지도 내 삶을 바르게 이끌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마을 계를 운영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맡은 일을 해내셨고, 그 곗돈으로 논과 밭을 조금씩 늘려나가셨습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전세에 살고 있어도, 집안 장손인 사촌 형이 사업을 시작하자 논을 팔아 상가주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형에게는 사업장이자 집이 되었고, 어머님께는 그 또한 지켜야 할 ‘가족’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직접 낳으신 우리 4남매 맏이인 누이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빨래, 밥 짓기 등 집안일과 밭일을 콩쥐처럼 시켜서 오죽하면 누이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어머님이 생모가 아닌 계모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큰아들이 논산훈련소로 군에 입대하는 날, 아침을 먹이고 “군대 잘 갔다 오라” 하며 먼저 논에 일하러 가셨습니다.
또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볼 때마다 인사를 드려라”라고 교육하였고, 저는 몇 분의 어르신들에게는 하루에 수 번을 인사드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식사를 할 때에도 “아버지께서 수저를 먼저 드시면 우리도 들고, 밥과 국은 절대 남기지 말라”라고 하셨고 그때 습관이 되어 지금도 밥 한 톨, 국물 한 모금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흙을 옷에 잔뜩 묻히며 놀다가 집에 오면,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이 씻게 하였고, 그 영향으로 군에서 한겨울 야근 근무 마치고 오면 차가운 물로라도 꼭 깨끗이 씻고 잠을 잤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님 덕분이었습니다.
농사철이 끝나도 어머님은 몸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다슬기를 잡으러 나가셨고, 메리야스 공장에서 박스를 접는 부업을 가져 오시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박스를 접어 공장에 납품했고, 그 일들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다슬기 잡을 때에 무거운 돌들을 들어 올리고 내리고 하면서 허리를 다치셨고, 일하실 때에 허리를 무리하셔서 50대 초반에 허리가 많이 아프셨습니다. 반듯이 누워있으면 괜찮은데 조금만 움직이면 허리뼈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고통이 심하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낫기 위해 전주, 서울 등 유명한 많은 병원들도 다녀 보았고, 허리에 좋다 하는 민간요법인 ‘엄나무, 토끼, 인분(人糞, 사람의 똥)’도 먹어 보았으나 허리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사람 송장의 물’이 허리에 좋다는 말을 듣고, 동네 분들에게 부탁하였고, 몇 달 후에 어렵게 물을 구해 드셔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우리 4남매는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병시중(누워있는 상태로 음식을 먹이고 목욕시키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을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자식에게 몹쓸 일 시키신다고 생각이 들어 몇몇 분에게 부탁하여 (자살하기 위해) 수면제를 사 모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다니시던 외숙모께서 자기 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오셨고, 목사님께서 어머님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그때마다 어머님께서는 심신의 평안을 느끼셨습니다. 농사일이 바빠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는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전남 장성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 가셨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와 치료를 병행하시며 많이 나으셨고, 개신교 신앙을 가지셔서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허리 아프실 때에는 환갑까지만 사는 게 소원이셨는데 85세를 사셨습니다. 급성 대동맥 박리로 몇 시간 고통을 느끼시다가 평안히 천국에 가셨습니다.
2018년 8월 15일 아파트 경로당에서 음식을 드시다가, 목 아래에서 뜨끔한 이상(대동맥 파열)을 느끼셔서 집으로 오셨고 안정을 취하셨으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전북대병원 응급실로 가셨지만 휴일이라 전문의가 없어 병 진단에 시간이 흘렀고, 응급 수술을 집도할 의사가 없어서 몇 시간을 더 계시다가, 저녁 늦게 익산시 원광대병원에 수술하실 의사가 계시 다하여 병원으로 이송 중, 쇼크가 오셨고 밤 10시 49분에 당신이 그렇게 소망하시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어머님,
고통 없는 천국에서 이제는 근심도 모두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쉬세요.
혹시 가능하시다면, 아버지 꿈에 한 번 찾아와 주세요.
어머님을 참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