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참새 쫓던 아이의 꿈)
나는, 농부이신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 앞이나 마을 공터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고추, 나락(벼) 등을 거두고, 퇴비를 퍼서 논에 뿌리곤 했습니다.
방학이나 휴일엔 이른 아침부터 새막으로 향했습니다.
떡 한 조각, 미숫가루 물, 그리고 미니 자석 장기판을 들고…
하루 종일 참새를 쫓는 것이 나의 일과였습니다.
참새가 논으로 날아들면
“워~~~ 워~~~” 하며 소리 지르고 깡통을 두드리고, 카바이드 총을 뻥뻥 쏘아댔습니다.
참새가 논에 앉기라도 하면 흙을 담은 막대기로 쫓아내거나 직접 논 가장자리까지 뛰어가 내쫓았습니다.
1970년대,
우리 마을의 논도 경지정리 사업으로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변했습니다.
경지정리를 마친 논엔 자갈이 많았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빈 비료 포대를 들고 하루 종일 자갈을 줍고,
일당 100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군것질을 하며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 같았습니다.
모내기하는 날,
동네 어르신들이 일렬로 줄지어 모를 심을 때면 나는‘모쟁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모가 남으면 뒤로 넘기고, 모자라면 앞으로 옮겨주는 일.
그 일은 모를 심는 농부들의 속도와 남은 모판 등을 계산하여 각각 농부들에게 적절하게 모를 대줍니다.
그 시절에는 비료와 거름도 귀했습니다.
풀을 베어 썩힌 거름, 볏짚과 왕겨에 인분을 섞어 만든 퇴비…
학교 방학 숙제로도 퇴비용 풀 몇 kg을 제출해야 했고 우리는 낫을 들고 들판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또 운동장에 웅덩이가 생기면 삽과 괭이를 들고 직접 메꾸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래미 댕깡(오징어 게임), 막자 치기, 구슬치기, 말뚝박기, 나이 먹기 등
종일 뛰며 놀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참새 쫓아라, 나락 뒤집어라, 고추 담아라”는 부모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놀이를 중단하고 일하러 가면서, 어린 마음에 계속해서 놀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농부셨습니다.
그때 나는 다짐했습니다. “나는 커서 공무원이 되어, 내 아이에게는 농사일시키지 않겠다.”
그 다짐은 결국 나를 공기업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공무원은 아니지만 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 그 꿈은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꿈이 무엇인가요?”
가난해서 시작된 다짐이었고 부러움에서 비롯된 꿈이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꿈이 나를 지탱해 주었습니다.